임병찬 林炳瓚

의병 독립장(1962) 내국인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본관
평택(平澤)
이명(별칭)
자 : 중옥(中玉), 호 : 돈헌(遯軒)
출신지
전북 옥구(沃溝)
운동계열
의병
포상훈격
독립장(1962)

주요 활동

1906년 최익현 의병부대에서 활동, 1914년 독립의군부 조직 활동

관련 사건

중기의병(최익현 의병부대)

관련 조직

독립의군부

생애

1851년 (음)2월 5일 전라북도 옥구현(沃溝縣) 서면(西面) 상평리(上坪里, 현 군산시 옥구읍 상평리)에서 아버지 임용래(林榕來)와 어머니 송악 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평택(平澤)이다. 자는 중옥(中玉)이며, 호는 돈헌(遯軒)이다. 1855년 같은 마을에 있던 사숙(私塾)에 들어가 송영숙에게 『사자소학』과 『오언당음(五言唐音)』 등의 글을 배웠다. 그해 조용성(趙龍成)에게 『자치통감』 등의 사서를 배웠다. 1858년 향시 백일장에서 수석을 차지하였다. 1867년 옥구 형방(刑房)이 되었고, 1868년 옥구 예방(禮房), 완영(完營) 공방(工房)을 지냈으며, 1869년 완영 예방이 되었다가 그 직을 그만두었다. 1872년 옥구 호장(戶長)이 되었다. 1882년 임씨 일가 8명, 처족 2명과 그 식솔들을 거느리고 옥구 상평리에서 태인군(泰仁郡) 산내면(山內面) 두월리(杜月里) 영동(永洞)으로 이사하였다. 1887년 전라우도 암행어사 심상학(沈相學)의 서계별단(書啓別單)을 대필(代筆)하였는데 전라우도의 민폐사(民弊事)와 그에 대한 대책을 적은 것이었다. 1888년 전국에 큰 흉년이 들자 사비 1,000냥을 내어 관찰사의 진휼을 도왔고, 돈 3,000냥과 쌀 70석을 내어 가난한 친척과 친구들을 도왔다. 그리고 국왕이 서울에 진휼청(賑恤廳)을 설치하고 진휼을 하자 1,000냥을 보냈다. 이러한 공로로 1889년 호남지역 유생들에게 천거되고, 고을 수령도 포상을 계청하여 거문도의 설진별감(設鎭別監)이 되었다. 5월에는 이 공으로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折衝將軍 僉知中樞府使 兼 五衛將)이라는 벼슬과 3대를 추증한다는 교지를 받았다. 7월에는 같은 공으로 낙안군수 겸 순천진관 병마동첨절제사(樂安郡守 兼 順天鎭管 兵馬同僉節制使)를 제수 받고, 8월 12일에는 임기 1년의 낙안군수에 부임하였다. 1890년 9월 낙안군수직을 사직하고 태인(泰仁)으로 돌아왔다. 1893년 산내면 두월리 영동에서 옥정호(玉井湖)를 건너 산내면 종성리(宗聖里)로 이주하였다. 1894년 4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자제들에게 ‘의를 지키고 검소하게 지낼 것’을 요구하고, 전주에 있는 무남영(武南營) 우령관(右領官)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농민군 지도자 김개남(金開南)을 유인하여 관군에게 넘겨주는 일에 적극 나섰다. 김개남은 1894년 11월 청주성을 공격하였으나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후퇴하였고 12월에는 고향인 태인 장금리(長錦里)에 있는 매부 서영기(徐英基)의 집에 숨었다. 이를 눈치 채고 김종섭(金琮燮)과 동민 수십 명을 시켜 김개남을 송두용(宋斗鏞)의 집으로 유인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김송현 등으로 하여금 전라도 위무사(慰撫使) 이도재(李道宰)에게 고발하게 하였다. 1895년 1월 조정에서 김개남을 체포한 공으로 임실군수를 제수하였는데 나아가지 않고 쌀 20석을 보냈지만 받지 않았다. 김개남을 고발한 것은 공명(功名) 때문이 아니라 ‘민국(民國)’을 위한 것이라며 거부하였다. 1898년 군부대신 심상훈(沈相勳)의 추천으로 균전사(均田使)에 임명되어 전주·옥구·임피·김제·부안·태인·금구 등 7읍의 균전(均田)을 관리하였다. 이때 균전은 왕실 소유지이므로 규정대로 징세하겠다고 하자, 징세에 반발하는 농민항쟁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1901년 호남지방에 큰 흉년이 들자 전라관찰사 조한국(趙漢國)의 요청으로 조한국이 설치한 진휼청(賑恤廳)의 감동(監董)이 되었다. 1904년 1월 1일 자손들을 불러모아놓고 의병 봉기의 뜻을 밝혔다. 러일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전쟁이 일어나면 고종의 안부가 걱정되니 고종을 호위할 근왕 의병을 일으키겠다는 것이었다. 이후 사람들에게 10일분 식량을 준비하여 의병 봉기에 대비하라는 통문을 작성하여 각처에 보냈다. 그런데 1월 11일 주사 은송열(殷松悅)로부터 “따르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라는 답장을 받았고, 태인군수 손병호(孫秉浩)에게는 국왕의 승낙 없이 함부로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곤란하다는 답장을 받았다. 평소 알고 지내던 민씨 척족세력의 핵심인물인 민영소(閔泳韶)에게 국왕의 밀지를 요청하는 글을 보냈지만 망동(妄動)하지 말라는 대답을 받았다. 통문을 접한 유생들을 제외한 대신 이하 여러 군수가 시기가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하여 창의는 실행되지 못하였다. 그해 5월 전라도선무사 겸 관찰사 이승우(李勝宇)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되어 7월까지 활동하였다. 1905년 11월 27일 전주의 최학엽(崔學燁)으로부터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뜻을 함께 할 동지도 없고 무기도 갖추지 못하여 거의(擧義)하기가 어렵다고 한탄하였다. 1906년 1월 1일 아침 봉장소(封章疎)를 작성하였다. 천하에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는데, 나라가 망할 때 천하에 대의를 펼치고자 하는 자는 성패를 따지지 않는다고 하면서, 지금 폐하가 조칙을 내리고 싶어도 내릴 수 없을 처지이니 자신이 직접 왜경(倭京)에 가서 그들을 인의와 도리로서 깨우치고 여의치 않으면 그곳에서 목숨을 끊겠노라고 썼다. 1월 19일 최익현의 제자 최제학(崔濟學)이 의병을 함께 일으킬 것을 권유하는 최익현의 편지를 가져왔다. 7도 의병군의 통솔을 명한 1905년 11월 22일자 고종의 밀지를 받은 최익현은 곽종석(郭鍾錫)·김학진(金鶴鎭)·이용원(李容元)·전우(田愚) 등에게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권유했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낙담한 최익현에게 고창 사람 고석진(高石鎭)이 임병찬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자고 권하였다. 이렇게 하여 최제학이 최익현의 편지를 가져오게 되었다. 최익현의 편지를 받은 후, 호남의 지사들이 장차 의병을 일으키려는데 최익현을 추대하여 맹주로 삼고자 하오니 오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글을 최제학 편에 보냈다. 2월 그믐 최익현이 종성리로 자신을 찾아왔고, 6월 4일 정읍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창의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재산을 내어 무기를 만들고 병사를 모집하였다. 반동학군으로 활동한 임실의 김송현, 순창 삼방포수 채영찬, 태인의 포수를 지휘하던 김우섭 등을 통해 포수들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포수들에게 하루에 40전씩을 급료로 지불하였다. 1906년 6월 4일 최익현을 모시고 포수들과 가동(家僮) 100여 명을 데리고 무성서원으로 갔다. 거의를 알리는 통문이 사방에 돌려졌으므로 수백 명의 유생들이 서원에 모여들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호남지역에서 을사늑약 이후 최초로 의병이 봉기하였다. 태인의병이 호남지방에서 성세를 떨치자 일제는 군부를 통하여 광주·전주·안동의 진위대까지 동원하여 태인의병을 진압케 하였다. 6월 11일 광주관찰사 이도재(李道宰)가 의병 해산을 요구하는 고종의 칙령을 이들에게 전달하였으며,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가 급파되었다. 최익현은 같은 동족끼리 서로 죽일 수 없다며 의병 해산을 지시하였는데, 100여 명이 해산을 거부하고 남았다. 전주진위대가 이들을 해산하는 과정에서 13명이 남았는데, 그 중 한 명이었다. 6월 14일 진위대는 13명을 모두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다. 6월 25일 일제로부터 감금 2년을 받고 8월 27일 최익현과 함께 대마도(對馬島) 이즈하라(嚴原)에 있는 일본군 위수영(衛戍營)에 구금되었다. 1907년 1월 14일 황태자 가례 기념으로 형기가 감면되어 풀려났다. 1월 19일 부산항으로 귀국한 뒤, 부상상무회의소 김영규(金永圭)로부터 국채보상운동에 관한 설명을 듣고 동참을 약속하였다. 1월 29일 태인 집으로 돌아온 후 유관오(劉官五)·탁정호(卓正浩) 등과 단연동맹을 맺고 통문을 작성하여 각처에 발송하였다. 2월 9일 전북단연기도회에서 찬성장(贊成長)이라는 간부 직책을 맡아 달라고 했을 때 최익현의 유서를 고종에게 바치고 나서 회의에 참석하겠다고 답서하였다. 1907년 12월 김봉권(金奉權)·김태원(金泰元)·양인영(楊仁榮)·이평해(李平海)·조공삼(趙公三)·채영찬(蔡泳鑽) 등이 찾아와 의병 창의를 권하자, 일제와 전력 차가 현격히 나는 상황에서 의병전쟁은 무리라고 파악하고 거절하였다. 1908년 8월 4일 영광군수 부임을 거부하여 천안헌병대에 구속되었다. 천안헌병대에서 3차례에 걸쳐 집중적인 수사를 받았고, 9월 23일에는 서울의 사령부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고 다시 천안헌병대에 구금되었다. 경술국치 후 1910년 12월 13일 순창군 일본헌병소장이 와서 일왕의 은사금(恩賜金)과 첩지(帖紙)를 받으라고 하자 거절하였다. 1912년 11월 6일 공주 유생 이칙(李侙)이 찾아와 「종2품 가선대부 임병찬을 독립의군부 전라남도 순무대장」에 임명한다는 칙명과 고종의 처지를 설명하고 충신열사들의 구국활동을 촉구한다는 내용이 적힌 칙령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11월 11일 재질이 부족하여 임무를 감당할 수 없다는 상소를 이칙 편에 보냈다. 1913년 2월 15일 다시 전 참판 이인순(李寅順)이 면소(免訴)에 대한 비답(批答)의 밀조(密詔), 칙명 등을 가지고 태인으로 찾아왔다. 밀조와 칙명에는 ‘대한독립의군부 전라남북도 순무대장에 임명하고, 임의로 3품 이하의 인재는 택하여 임명하고 명을 어기는 자는 선참 후계하라, 나의 뜻을 나타내는 징표로 칼 한 자루를 보내서 상방검(尙方劍)에 대신하도록 한다’는 내용 등이 적혀 있었다. 이를 받고 아들 임응철(林應喆)로 하여금 이인순을 따라 서울로 가서 참판 이명익(李明翊)·김재순(金在淳)·곽한일(郭漢一)·전용규(田容珪) 등과 대사를 논하게 하였다. 그해 11월 독립의군부 거의(擧義) 방략을 담은 「관견」(管見)을 제작하였는데, 무력에서는 일제에 열세이며 무력을 기르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고 많은 재원을 확보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으니 문(文)으로 대적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라고 결론짓고, 그 방법으로 장서 투서를 구상하였다. 1914년 3월 24일 서울로 가서 정2품 자헌대부 독립의군부 육군부장 전라남북도 순무총장에 임명한다는 조명(詔命)을 받았다. 그리고 이명익·이인순 등과 협의하여 독립의군부의 편제를 조직하고 총 대표 27명과 각 도와 각 군 대표 302명, 합 329명을 선정하였다. 5월 3일 함경남도 관찰사 겸 순무총장에도 임명되어 독립의군부 조직을 북쪽지방까지 확대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5월 23일 경기 수원 책임자로 선정되었던 김창식(金昌植)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독립의군부 조직을 자백하였다. 이로 인해 많은 동지들이 체포되자, 총독에게 단독면회를 요청하였다. 5월 29일 총독을 대리하여 온 경무총감과 면담하면서 이른바 ‘한일합병’의 부당성을 통박하고 국권반환 및 일본군의 철병을 요구하였으며 일제의 한국독립 보장만이 동양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총독과 일제 내각총리대신에게 국권반환요구소를 보냈다. 이에 일제에 의해 붙잡혀 구속되었으며, 관계자들도 모두 투옥되었다. 옥중에서 자결을 기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6월 12일 거문도(巨文島)에 유배되었다. 1916년 6월 23일 유배지인 거문도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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