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규 金鼎奎

의병 애국장(1993) 내국인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본관
전주(全州)
출신지
함북 경성(鏡城)
운동계열
의병
포상훈격
애국장(1993)

주요 활동

1908년 경성(鏡城)의병을 주도, 1909년 북간도 망명, 1910년 유인석의 13도의군 장의군종사로 활동, 성명회 선언서 연명, 1912년 대종교에 입교, 이후 대성학교 설립에 참여, 1919년 3월 용정만세운동에 참여, 1920년 대한의군부 지방정위대 조직

관련 사건

후기의병(관북의병부대)

생애

1881년 (음)8월 3일 함경북도 경성군(鏡城郡) 명윤면(明潤面) 거문리(巨文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8세에 향숙에 입학하여 15세까지 한형기(韓衡琦)에게 수학하고, 함북 경성에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고 후기의병 항쟁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의병거의를 계획하였다. 고향 인근에 건설 중인 일본군의 나남(羅南) 병영을 정탐하기 위해 일본군 제19사단 사령부가 들어서는 나적동(羅賊洞)에 유숙하면서 일본군의 규모와 동태를 파악하였다. 나남병영은 1907년부터 1914년까지 약 8년에 걸쳐 한반도를 만주침략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대규모로 건설된 일본군 병영이었다. 경성의병(鏡城義兵) 조직 후 이때 파악한 지리와 정보를 바탕으로 나남병영을 주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1908년 8월에는 단신으로 나남병영에 들어가 목재소의 목재더미에 불을 지르는 등 세 차례의 방화를 시도하였다. 관북지역의 의병 항쟁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하자, 경성과 명천(明川) 등지의 동지들과 본격적인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이때 같이 경성의병에 참여한 이들은 이남기(李南基)·서상욱(徐相郁)·지장회(池章會)·차호균(車鎬均)·최진순(崔眞淳)·현창극(玄昌極)·박상눌(朴尙訥) 등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화서학파(華西學派) 유학자로 성암(性菴) 김병진(金秉振)의 제자들이었다. 1908년 3월에는 포대와 포탄을 구입하였으며 육로군사령관 명의의 격문을 작성 배포하고 의병을 모집하였다. 같은 해 8월에는 단신으로 나남병영에 들어가 목재소의 목재더미에 불을 지르는 등 세 차례의 방화를 시도하였다. 10월에는 경성의 최덕준(崔德俊), 명천의 김병진, 연해주에서 국내로 들어온 강동의병부대(江東義兵部隊)의 장석회(張錫會) 등과 연합하여 연합부대를 구성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군자금 1,500원을 모아 총탄 구매를 위해 연해주로 대원들을 파견하였다. 1908년 11월 초 일진회(一進會)의 밀고로 경성의병의 실체가 드러나 의병지도부 거처가 일제의 습격을 받았다. 이때 총무 이남기와 최승두·전원준(全元俊)·정태해(鄭泰海) 등 지휘부 인물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쫓기면서 경성의병의 조직은 거의 와해되었다. 국내를 떠나 간도에서 항일운동을 지속할 결심을 하고, 1909년 3월경 간도의 정세를 파악하고 돌아온 김하규로부터 간도 지역 정보를 입수하였다. 일가족 모두 간도로 이주하기로 결정한 뒤, 1909년 7월 먼저 북간도 옌지(延吉)로 망명하였다. 북간도에 도착한 후 지장회·차호균·서상욱·최진순·현창극·박상눌 등 옛 경성의병 동지들을 다시 규합하였다. 1909년 7월부터 간도 독판(督辦) 오록정(吳祿貞) 등 중국 관헌을 방문하여 의병항쟁을 위한 군사적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 과정에서 “한국과 중국은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처지이자, 일본이 공동의 원수임”을 강조하며 중국의 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중국 측이 일본으로부터 간도 지배권을 방어하기 위해 이주한인들의 치발역복(薙髮易服, 두발형태와 복장을 만주족 특유의 것으로 바꾸는 것)을 선 조건으로 내세우자 중국 귀화를 거부하였다. 그럼에도 군수(軍需) 지원 청원서, 의병지원 청원서 등을 지속적으로 중국 관헌에 송부하고 독판과의 면담을 추진하였다. 한편으로 임시 거처임에도 불구하고 후학 양성을 위한 교육을 재개하였다. 1910년 1월에는 조맹선(趙孟善)을 만나 이범윤 의군에 합류하기로 하고 북간도 지역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해 4월 이남기가 연추영(延秋營)(현 크라스키노)으로부터 유인석의 관일약서(貫一約序)를 가지고 방문하자, 같은 해 8월 노령(露領) 연해주(沿海州)에서 결성된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에 참여하여 장의군종사(壯義軍從事)로 활약하였다. 일제의 합병무효와 한민족의 자주독립을 천명한 성명회(聲明會)의 취지에 동참하여 성명회선언서(聲明會宣言書)에도 연명하였다. 10월부터는 의병세력을 규합하고자 동지들의 공동촌락을 형성하기 위한 땅을 물색하였다. 비귀화인이라는 국적 문제와 금전적 어려움 등으로 토지를 구입하는 것이 쉽지 않아 1913년에야 옌지청(延吉廳)과 가까운 달리동(達理洞)에 동지들과 공동 촌락을 형성하였다. 1912년 초 현천묵(玄天默)의 권유로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1912년 8월에는 정안립(鄭安立) 등과 함께 항일교육단체인 ‘사숙개량회(私塾改良會)’를 설립하고자 했으나, 반대파에 의해 제지되었다. 이에 동지들을 중심으로 한 ‘사우계(士友契)’를 다시 발족하여 학장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길동공교회(吉東孔敎會) 연길지회(延吉支會)’·‘동변민족친협회(東邊民族親協會)’ 등을 조직하고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였다. 이 시기 공묘성단(孔廟聖壇) 건립 의연금 모집을 위해 잠시 국내로 잠입하기도 하였다. 당시 모금활동의 경험과 인맥을 뒷날 의군부(義軍團)의 군자금 형성 등 의연(義捐) 활동에 이용하였다. 1919년 3월, 남영(南營) 국자가(局子街)에서 동생 김형규가 비밀리에 독립선언서를 가져오고, 이남준(李南俊)으로부터 북간도 롱징(龍井)만세운동 계획을 들었다. 3월 13일 롱징만세운동에 참가하여 현장에 운집한 민중의 저력을 보면서 구국의 가능성을 재확인하였다. 이에 동지들과 ‘조선민단(朝鮮民團)’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와 경고장을 찍어 배포하였다. 중국 국민당원들과도 공동 항일투쟁 방법을 논의하고, ‘대한의군화령사무중부(大韓義軍華領事務中部)’를 결성하고 대한민단(大韓民團)을 창설하였다. 1920년 8월에는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 지방정위대(地方正衛隊)를 편성, 연해주의 의군본부에 무기와 군자금을 조달하였다. 9월 일본이 중국과 화약을 맺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탄압하고 경신참변(庚申慘變)을 일으키자 북간도 한인사회가 거의 와해되었다. 경신참변 직후까지 잔류한 의군부 지방조직의 명맥을 유지하다가 신변이 완전히 노출되어 중국군과 일본 영사관에서 각각 경찰 조사를 받았다. 이후 옌지 시내로 이주하고 표면적인 항일 활동은 중단하였다. 항일운동 중에도 중국과 세계의 동향에 주목해, 각종 신문에서 주요 사건들을 발췌, 기록하는 등 당대의 사건들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국내 경성의병 시기부터 1921년까지 일기류인 『야사(野史)』 17권을 저술해 경성의병의 활동과 초기 북간도 한인사회의 실상을 생생하게 기록하였다. 경신참변으로 더 이상의 기록이 불가능해지자, 일기를 깊이 숨기고 절필하였다. 1932년 옌지 시내로 이주한 이후에는 한의사로서 평생을 살았으며, 무료 진료를 많이 베풀어 명의(名醫)이자 진의(眞醫)로서 명망을 떨쳤다. 1936년경 고향 제자들이 경성에 ‘용연김선생구거기념비(龍淵金先生舊居紀念碑)’를 세우자, 1937년 여름에 일시 고향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1953년 8월 29일 73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장바이향[(長白鄕)] 달리동에 묻혔다. 2007년 11월 7일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유해를 봉환하여 안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폭도에 관한 편책(江原, 咸鏡)』. ; 朝鮮駐箚憲兵隊司令部, 「(朝憲機 제3호 1914년 1월 8일) 北間島 鮮人 騷擾의 건」·「(朝憲機 제4호 1914년 1월 9일)北間島 鮮人 騷擾의 건 續報」,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 金正明, 「朝鮮駐箚永久兵營(官衙)建築起工竣工一覽表(羅南)」, 『朝鮮駐箚軍歷史』, 東京:巖南堂書店, 1967.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龍淵金鼎奎日記』 상·중·하, 1994. ; 김정규, 『계림가승완산유록합편』. ; 국가보훈처, 『해외의 한국독립운동사료』 2·20, 1995·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