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신 金東臣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본관
경주(慶州)
이명(별칭)
자 : 원표(元表) 호 : 청암(淸庵)
출신지
충남 회덕(懷德)
운동계열
의병
포상훈격
독립장(1977)
주요 활동
1906년 전북에서 민종식의 의병 모집 협조, 노성의 궐리사 강회에 참석, 최익현의 종사로 활동, 1907년 내장산에서 기우만 고광순과 거병 논의, 지리산 인근의 의진과 연합 거병
생애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원표(元表), 호는 청암(淸庵)이다. 1871년 12월 26일 충청남도 회덕군(懷德郡) 탄동면(炭東面) 덕진동(德津洞)에서 김요제(金堯濟)와 창원(昌原) 황씨(黃氏) 사이에서 6형제 중 3남으로 출생하였다. 생몰년도에 약간 차이가 있는데, 족보에 따르면 1872~1933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형은 중인(中人), 자신은 의업(醫業)이라 한 점으로 보면 그의 집안은 한미한 중인 집안으로 추정된다. 17세에 부친이 사망했는데, 당시 막내 동학(東鶴)은 세 살이었다. 이로써 보면 집안은 경제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처지였을 것이며, 젊은 시절부터 의업에 종사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을사늑약의 강제 체결 소식을 들은 뒤 의병에 가담할 생각을 하는 한편, 일제의 한국 침략이 갈수록 노골화되어가는 과정을 주의 깊게 관망하였다. 그는 일제가 “강화도조약 이후 한국의 독립을 핑계 삼아 국권을 모두 강탈했으며, 보호를 빙자하여 백성의 재산을 거의 빼앗았다. 마침내 국모의 변과 황제의 욕됨이 극에 달하였다”라면서 국가의 원수를 갚고 백성의 생명을 구하고자 의병에 나섰다. 1906년 (음)3월 중순 전 참판 민종식(閔宗植)과 접촉하였다. 당시 민종식은 충남 예산의 광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패퇴한 후 전라북도 전주·진안(鎭安)·용담(龍潭)·장수(長水)·무주(茂朱) 등지를 전전하며 의병을 규합하는 중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민종식을 만나게 되었고, 이때 의병 규합의 조력자로 활동하였다. 이미 오래전부터 전북을 왕래하며 장수와 무주에 지인들이 특히 많았던 터라 민종식을 돕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때 도움을 받으려고 민종식이 ‘칙지(勅旨)’를 준 것으로 짐작된다. 민종식 의병부대의 선봉장이라 표방하면서도 홍주의병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 다만, 홍주의병에 가담할 의병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민종식 의병부대의 선봉장임을 내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민종식이 의병을 거두어 충청도로 돌아가 홍주성을 재차 공격했으나, 또 실패하였다. 홍주의병의 실패 원인으로 신분 문제를 들었는데, 민종식이 양반 사족 중심의 의병으로 운영한 것에 대한 불만을 품고 홍주의병에 가담하지 않았다. 이 시기에 충남 노성(魯城)의 궐리사(闕里祠)에서 최익현이 주관한 강회에 참석하였다. 당시 최익현의 경우에도 거의를 준비 중이었다. 자신도 그 역시 종사관의 임무를 맡아 영호남을 순회하며 의병을 모집하였으나 태인의병 역시 실패로 끝났다. 이처럼 그가 직간접으로 관련된 의병 봉기가 모두 실패하자 독자적인 거병 계획을 수립하였다. 마침 1907년 7월 이른바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어 일제의 내정간섭이 심화된데다 고종의 강제 퇴위를 당하자, 직접 의병을 일으킬 결심을 굳혔다. 민종식으로 받은 칙지를 소지하고 있었으므로 의병의 모집에 유리하였을 것이다. 영호남 각지를 돌아다니며 의병을 모으는 과정에서 칙지를 앞세워 자신을 승지(承旨)로 소개했을 것이다. 그로 인해 일제는 승지를 참칭(僭稱)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1907년 (음)8월 전북 정읍(井邑)의 내장산(內藏山) 연암사(然菴寺), 혹은 백양사(白羊寺)에서 기우만(奇宇萬)·고광순(高光洵)과 더불어 구체적인 거병 계획을 논의하였다. 한편, 자신의 『문집』에서는 남원의 고광수 집에서 이들을 만나 의병 봉기를 의논한 것으로 적고 있다. 당시 약 80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 선봉장 유종환(兪宗煥), 중군장 염기덕(廉基德, 혹은 염기준(廉基俊)), 후군장 임병주(林秉柱), 군량장 박헌태(朴憲泰)·국인묵(鞠仁黙) 등이 주요 구성원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충청·전라·경상도 출신이었다. 의병부대의 명칭을 삼남창의소(三南倡義所)라고 했으며, 자신을 삼남창의소도원수(三南倡義所都元帥) 혹은 대한창의대장이라 하였다. 삼남창의소의 전체 규모는 1,000명이 훨씬 넘는 것으로 주장했지만, 실제로 각자 통솔한 의병 규모는 수십 명에서 100~200명 정도였을 것이다. 삼남창의소의 주도 인물들은 대체로 양반 유생이었고, 일반 병사층은 농민과 산포수, 행상 등 평민들이었다. 이들을 효과적으로 통솔하기가 쉽지 않았다. 여러 의병부대가 연합한 형태인 데다 학문적 동질성이나 지역적·혈연적 기반이 각각 달랐기 때문이다. 이에 해산 군인들을 영입하여 부대의 전술과 화기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들의 항일투쟁은 1907년 9월 10일 시작되었다. 순창읍에 위치한 우편취급소와 경무분파소 등을 공격하여 일본인 2명을 처단하였다. 이들은 내장산에서 지리산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순창읍을 공격하였다. 지리산으로 입산해서는 경남 서부 지역까지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지리산에 근거를 만들고, 안의(安義)·하동(河東)·함양의 각 부락에 격문을 보내 국가의 위급을 알리며 각료의 비정(秕政)을 탄핵하였다 아울러 일본인을 몰아내지 않으면 더러움이 백세에 끼친다면서 의병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여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들은 문수사와 같은 지리산 내의 사찰을 근거지 삼아 경남 함양, 전북 남원·순창·정읍, 전남의 곡성·구례 등 3개 도에 걸쳐 활약하였다. 인근 지역에 활동 중인 의병부대와는 적극적인 연대 혹은 연합전선을 형성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전북에서 활동한 이석용(李錫庸) 의병부대와는 일정기간 연합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일제 군경과 지속적으로 전투를 벌였는데, 우편취급소나 분파소와 같은 일제의 침략기관을 주로 공격하였다. 특히 1907년 8월부터 12월에 이르는 기간에 주로 지리산 내의 사찰을 근거지로 삼아 크게 활동하였다. 일제는 1907년 10월 하순 김동신 의병부대가 주둔했던 문수사를 소각하였다. 당시 일제의 군경 토벌대는 이들을 진압하려고 구례 연곡사(鷰谷寺)를 급습하였다. 연곡사 전투에서 고광순을 비롯한 20명 내외의 의병이 전사하였다. 1908년 1월 일제는 이들을 진압하려고 지리산 인근의 수비대와 경찰 병력을 총동원하였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다시 4월에 소재를 파악하기 위한 변장대(變裝隊)를 출동시켰다. 이 작전은 전남 서부 지역과 동부 지역의 의병을 동시에 겨냥하여 실시되었다. 전남 서부 지역의 경우에는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진압하려는 것이었고, 동부 지역에서는 김동신 의병부대를 섬멸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호남창의회맹소는 기삼연 의병장을 비롯하여 200여 명이 희생되었으나, 김동신 부대는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1908년 6월 6일 일시 귀향했다가 대전의 순사대에 붙잡혔다. 당시 상당량의 서류를 소지하고 있었는데, 마포(麻布) 24족(足), 짚신 220족(足), 사령서(辭令書) 2매, 일기장 1책, 통문 28통, 왕복문 38통, 명령서 7통, 정탐 서류 28통, 청원서 11통, 회계서류 10통 등이었다. 일기를 비롯하여 매우 다양한 서류를 지참하고 있었는데, 대체로 무주 출신의 유서기(兪書記)가 작성한 것이었다. 정탐 서류는 일제 군경의 동향을 파악한 문서이며, 왕복문은 우국지사들에게 의병을 권유하는 내용이었다. 또한 주민들에게 군자금이나 물자를 징발하는 명령서, 그것을 경감해달라는 주민들의 청원서였다. 체포될 당시 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귀향했다고 주장하였다. 『문집』에서는 의병 투쟁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자 청나라에 군사 원조를 요청하려고 상경하는 중이었다고 적었다. 그렇다면 의병 항쟁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러 상경하던 중 집에 들렀다가 체포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한국인 경부(警部)에 의해 4회에 걸쳐 신문을 받은 청취서(聽取書)가 남아 있다. 재판 과정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종신형으로 감형된 후 1910년 9월에 일제의 사면으로 방면되었다. 저술로는 『문집(文集)-창의사적초(倡義事蹟抄)-』이 있으며, 한국인 경찰이 신문한 청취서가 남아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대한매일신보』 1907.9.25, 10.11, 『경향신문』 1907.10.4. ; 「판결원본」(1908.8.15), 공주지방법원 형사판결원본, 1908. ; 『경주김씨세보』 (전8책) 제2책, 충남 홍성, 1934. ; 『한말의병전쟁자료집-暴徒檄文-』, 선인, 2000. ; 송상도, 『기려수필』, 국사편찬위원회, 1971. ; 『독립운동사자료집』 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 『한국독립운동사』 1, 국사편찬위원회, 1968.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8-19, 국사편찬위원회, 1969~1990. ; 『전남폭도사』, 전라남도 경무과, 1913. ; 이일룡 역, 비록전남의병전투사, 전남일보, 1977. ; 『조선총독부관보』 1910.9.5, 「司法」. ; 홍순권, 『韓末 湖南地域義兵運動史 硏究』, 서울대학교출판부, 1994. ;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일조각, 2004. ; 홍영기, 『한말 후기의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