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鄭信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이명(별칭)
호 : 일우(一隅)
출신지
함남 홍원(洪原)
운동계열
만주방면
포상훈격
독립장(1963)
주요 활동
1919년 3월 대한정의단 참여, 북로군정서(대한군정서) 인사국장, 1923년 북간도 독립군대표로 국민대표회의 참여, 국민대표회의 군사과 위원, 북간도 군사단체 대표로 헌법개정위원회의 참여, 1924년 3월 상해교민단 회계검사원, 1925년 신민부 연락부 위원장, 한족총연합회 회장, 한국독립당 선전부장
관련 조직
대한정의단, 북로군정서(대한군정서), 신민부, 한족총연합회, 한국독립당(만주)
생애
함경남도 홍원(洪原)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898년생으로 추정된다. 호는 일우(一隅)다. 본관과 정확한 가계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유년시절 한학(漢學)을 수학하였다. 1915년 1월 12일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한 이후 1917년에는 동만주(東滿洲)와 함경도 지역을 관할하는 동1도본사(東1道本司)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동1도본사에 함께 소속된 대종교 인물로는 여준(呂準)·신팔균(申八均)·김동삼(金東三)·김좌진(金佐鎭)·이범석(李範奭)·현천묵(玄天黙) 등이 있었다. 이 시기 서일(徐一)·계화(桂和)·고평(高平) 등과 함께 대종교 경전인 『회삼경(會三經)』과 『도해삼일신고강의(圖解三一神誥講義)』 등을 『사착합부(四冊合附)』라는 제목으로 편찬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간하며 대종교 활동에 힘썼다. 대종교에 입교했을 때 중광단(重光團)에 가입해 활동을 전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광단은 서일이 계화·채오(蔡五)·양현(梁玄) 등과 함께 1911년에 조직해 지린성(吉林省) 왕칭현(汪淸縣)에 본부를 두고 활동한 독립운동단체였다. 중광단은 주로 대종교 교리와 교육을 통해 청년들의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정확한 일자는 확인되지 않지만, 대종교에 입교한 직후부터 중광단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1919년 3월 25일 서일·계화·채오 등이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을 창설하자 이에 참여하였다. 대한정의단은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중광단의 토대 위에 대종교도를 규합해 만든 항일무장단체이다. 그해 (음)7월 서일·계화·김성(金星)과 함께 연서(連書)로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일본의 침략주의에 대해 경고하는 서신을 일본 총리에게 보냈다. 그해 10월 대한정의단이 대한군정회(大韓軍政會)과 통합하는 한편, 김좌진이 합세해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로 개편되었다. 이와 함께 러시아 연해주에서 다량의 무기를 구입해 전력을 강화하였다. 12월에는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명칭을 변경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인준을 받았다.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라는 명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대한군정서는 개편 당시 총재 서일, 총사령관 김좌진, 참모장 이장녕(李章寧), 사단장 김규식(金奎植), 여단장 최해(崔海), 연대장 정훈(鄭勳), 연성대장(硏成隊長) 이범석(李範奭)을 선임하였다. 이때 총재부 인사국장으로 활동하였다. 일본군이 독립군을 진압하기 위해 만주로 군대를 보내자, 1921년 1월 만주의 각 독립단 간부들은 러시아 연해주에서 문창범(文昌範)과 협의해 옌지현(延吉縣) 숭례향(崇禮鄕) 도목구(倒木溝)에 통신부본부(通信部本部)를 설치하고, 각 방면에 통신원을 배치해 긴밀히 협력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때 통신부본부 부장으로 선임되어 국민회(國民會)의 김규찬(金奎燦)와 함께 각 독립단과 연락하며 정보를 전하는 한편, 부속 기관지로 『태평양신보(太平洋新報)』를 발행하였다. 1921년부터 임시정부의 진로를 비롯한 독립운동 방안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 소집이 요구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1922년 5월 국민대표회의주비회는 ‘소집선언서’를 발표하였고, 회의가 몇 차례의 연기를 거듭한 끝에 1922년 말부터 국내와 상하이(上海), 만주, 베이징(北京), 연해주 등지에서 활동하던 120여개 단체의 대표들을 소집하였다. 이에 북간도 독립군(北間島 獨立軍) 대표 자격으로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그해 12월 상하이로 향하였다. 국민대표회의는 1923년 1월 3일 개막되어 김동삼을 의장으로 1월 31일부터 본회의를 시작하였다. 2월 국민대표회의에서 지청천(池靑天)·김동삼·김철(金鐵)·배천진(裴天津)·신일헌(申日憲)과 함께 군사과 위원으로 선정되어 활동하였다.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창조파와 임시정부를 유지하면서 개편, 보완해야 한다는 개조파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면서 회의는 난항을 겪었다. 이에 타협을 위해 각 파에서 협의를 계속했는데, 안창호(安昌浩)·손정도(孫貞道)·왕삼덕(王三德)과 함께 개조파의 일원으로 협의에 참여하였다. 이때 창조파에서는 신숙(申肅)과 윤해(尹海), 중립파에서는 김동삼, 임시정부측에서는 노백린(盧伯麟)·조소앙(趙蘇昻)·홍진(洪鎭)이 협의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협의는 의견대립으로 난항을 겪고 결렬되었다. 그 해 7월 임시정부는 개조파의 의견을 받아들여 헌법 개정을 결정하고, 헌법개정위원회의(憲法改正委員會議)를 상하이 프랑스조계에서 개최하였다. 이 때 김리대(金履大)·조상벽(趙尙壁)과 함께 각각 북·서간도 군사단체 대표로 참여하였다. 한편, 그 해 국내에서는 장마와 해일로 인해 경기도와 평안도, 황해도 지역이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상하이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시영(李始榮)·김동삼·손정도 등 30여 명의 인사들은 그해 8월 동포수재구제회(內地同抱水災救濟會)를 발기하고 성금을 모아 수재를 입은 지방으로 보냈다. 이때 위원장으로 선정되어 활동하였다. 그리고 9~10월 간 역사서 『배달족역사강역고(倍達族歷史疆域圖)』와 『사지통속고(史誌通俗考)』를 저술해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에서 출판하였다. 『사지통속고』는 역사에 기록되어 전해지는 일반적인 풍속을 살핀 책으로, 우리의 고유어를 통해 전래되고 있는 국명(國名)과 왕명(王名)·인명(人名)·산수(山水) 등을 연구한 저서이다. 1924년 3월 개최된 상해교민단(上海僑民團) 제110회 정기의사회에서 여운형(呂運亨)을 민단장(民團長)으로, 조상섭(趙尙燮)을 인성학교(仁成學校) 교장으로 선출했는데, 이때 회계검사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25년 1월 지린성 무링현(穆陵縣)에서 북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들을 통합하는 데 목적을 둔 부여족통일회의(扶餘族統一會議)가 개최되었다. 회의 결과 그해 3월 닝안현(寧安縣) 영안성(寧安城) 내에서 대한독립군정서와 대한독립군단, 중동선 교육회 등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북만주지역의 통일 독립운동 단체로 신민부(新民府)가 결성됐다. 이 때 김혁(金赫)·조성환(曺成煥)과 함께 대한독립군정서 대표로 참석하였고, 대한독립군단 대표로는 김좌진과 남성극(南星極)·최호(崔灝)·박두희(朴斗熙)가 참석하였다. 이후 신민부에서 연락부 위원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이듬해 9월에는 사회주의 사상이 신민부 내 청년들의 사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신영빈(辛英彬)·장준걸(張俊杰) 등과 함께 닝안현에서 신민부 내에 귀일당(歸一黨)을 조직하였다. 당원이 1,000여 명에 달했던 귀일당의 간부들과 당원들은 대부분 대종교인들로 구성되었다. 1927년 2월 하얼빈 일본영사관 경찰과 중국경찰이 합동으로 웨이허현(葦河縣) 석두하자(石頭河子)에 위치한 신민부 본부를 습격해 중앙집행위원장이었던 김학소를 비롯한 12명의 간부들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신민부는 회의를 열고 중앙집행위원장을 비롯한 간부들을 새로 선출하고 향후 활동방향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러나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는 군사부위원장 김좌진과 교육과 산업을 발전시킬 것을 주장한 민사부위원장 최호의 의견이 대립하였다. 결국 신민부는 민정위원회와 군정위원회로 분열되었는데, 황학수(黃學秀)·권갑민 등과 함께 군정위원회에 참여하였다. 전민족이 대동단결해 유일한 정당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전개하자고 주장하는 유일당운동은 1926년 상하이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만주지역에서는 1928년 홍진이 정의부 지도자들을 만나 유일당운동 전개를 종용하며 본격화되었다. 그해 5월 정의부와 참의부, 신민부를 비롯해 만주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18개 단체가 참여한 ‘전민족유일당조직촉성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유력한 단체를 중심으로 군소 단체가 통합되어야 한다는 의견과 기존 단체들을 완전히 해체하고 개인 중심으로 유일당을 조직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립하였다. 결국 단체 중심의 통합을 주장했던 세력은 전민족유일당협의회를, 개인 중심으로 유일당을 조직할 것을 주장한 세력은 전민족유일당촉성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이듬해 7월 지린성 신안둔에서 3부통합회의가 열렸지만 통합에 실패하고 결렬되었다. 이때 신민부 내에서도 개인을 중심으로 유일당을 조직할 것을 주장한 군정위원회측과 단체중심의 통합을 주장한 민정위원회와의 간 의견이 대립하였다. 이듬해 4월 신민부 민정위원회가 국민부(國民府) 조직에 참여하자, 이를 반대하는 김좌진·민무(閔武)·김종진(金宗鎭) 등의 군사위원회 인사들과 함께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결성하였다. 이듬해 1월 김좌진이 공산주의자 박상실(朴尙實)에 의해 암살되자, 한족총연합회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곧이어 홍진·지청천 등과 함께 한족총연합회를 중심으로 하여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하고 선전부장으로 선임되었다. 한국독립당은 한족총연합회를 민중을 관리하는 외부기구로 하는 한편, 당 내부에 6개의 위원회를 설치하고 군사·민정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며 진영을 정돈하고자 하였다. 그 해 12월 중국 관헌들과 토지경작문제를 논의하고 돌아오던 도중 지창현(吉長縣) 화피역(樺皮驛)에서 공산주의자에 의해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高警 제4057호, 上海ニ於ケル國民代表會ノ經過ニ關スル件」, 1922. 12. 23, 『日本外交史料館資料』. ; 「高警 제546호, 國民代表會ニ關スル件」, 1923. 2. 19, 『日本外交史料館資料』. ; 국회도서관 편, 『한국민족운동사료 (중국편)』, 1976. ;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정훈처 편, 『광복』 1, 1941. ; 『동아일보』, 1923. 3. 8, 6. 14, 7. 15, 9. 14, 10. 4, 12. 24, 1924. 1. 9·24, 1925. 3. 8, 1927. 8. 3, 1930. 3. 26, 1931. 1. 14. ; 이숙화, 「大倧敎의 민족운동 연구」,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