퉁화 신흥학우단 본부 터 (합니하)
위치 정보
역사적 의의
신흥무관학교 출신들로 이루어진 교우단체
설명
1911년 6월 설립된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는 이회영·이상룡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염원이 한데 모아진 결과물이었다. 신민회에서 추진했던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함께 실행된 무관학교 설립의지가 바로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으로 나타난 것이다.
추위가 온몸을 고통스럽게 하는 서간도 유하현에서 출발한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8월경 폐교될 때까지 약 3천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할 정도로 그 생명력과 조직력은 다른 학교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신흥무관학교를 더 강하게 조직하고 단련하는 외곽단체가 조직되었다. 신흥교우단이 그것이다. 후일 신흥학우단으로 명칭을 바꿨지만 설립 초기의 목적과 활동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신흥교우단은 조직 후 기관지《신흥교우보》를 발행했다. 기관지를 발행하는 것은 독립운동단체들이 한국인들에게 독립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널리 홍보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였다. 이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독립신문》을 발행하였던 사실, 권업회에서《권업신문》을 발행한 사실 등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동안 《신흥교우보》는 신흥무관학교 출신 학생들로 조직된 신흥교우단에서 발행하였다고 알려졌을 뿐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2010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는 미주지역 자료기증을 펼칠 때 지금까지 실체가 확인되지 않고 있던《신흥교우보》를 미국 교포로부터 기증받았다.
1913년 5월 6일 독립운동의 조직적 전개와 신흥무관학교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 신흥교우단을 합니하 신흥무관학교에서 창단하였다. 신흥교우단은“혁명대열에 참여하여 대의를 생명으로 삼아 조국 광복을 위해 모교의 정신을 그대로 살려 최후 일각까지 투쟁한다”는 설립목적을 분명히 했다. 독립군 양성소의 기능을 담당한 신흥강습소가 자기 울타리를 넘어 연해주와 미주에까지 자신의 존재를 알렸던 것은 바로《신흥교우보》의 발간을 통해서였다. 미국의 안정적인 신문발행에 비하여《신흥교우보》의 발행은 그만큼 여러 가지 장애를 극복해야 하는 여정이었다.
농한기에는 군사훈련과 계몽교육을 실시하는 노동강습소와 노동학교도 경영했으며 자위대를 조직하여 일제의 앞잡이가 침입하는 것을 방지하는 등의 사업에 주력하였다. 신흥학우단은 혁명의 대오에 참가하고 대의를 생명으로 삼아 조국광복을 위하여 모교의 정신을 함양, 최후의 한 시각까지 싸운다는 각오로 활동하였다.
신흥(교우)학우단 본부 터에 대해서는 원병상의 수기에 근거해서 유하현 삼원포 대화사라고 비정하고 있으나《신흥교우보》제2호의 내용에는 합니하를 본부로 하고 있다고 했다.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터인 고려관자 마을로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추위가 온몸을 고통스럽게 하는 서간도 유하현에서 출발한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8월경 폐교될 때까지 약 3천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할 정도로 그 생명력과 조직력은 다른 학교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신흥무관학교를 더 강하게 조직하고 단련하는 외곽단체가 조직되었다. 신흥교우단이 그것이다. 후일 신흥학우단으로 명칭을 바꿨지만 설립 초기의 목적과 활동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신흥교우단은 조직 후 기관지《신흥교우보》를 발행했다. 기관지를 발행하는 것은 독립운동단체들이 한국인들에게 독립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널리 홍보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였다. 이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독립신문》을 발행하였던 사실, 권업회에서《권업신문》을 발행한 사실 등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동안 《신흥교우보》는 신흥무관학교 출신 학생들로 조직된 신흥교우단에서 발행하였다고 알려졌을 뿐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2010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는 미주지역 자료기증을 펼칠 때 지금까지 실체가 확인되지 않고 있던《신흥교우보》를 미국 교포로부터 기증받았다.
1913년 5월 6일 독립운동의 조직적 전개와 신흥무관학교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 신흥교우단을 합니하 신흥무관학교에서 창단하였다. 신흥교우단은“혁명대열에 참여하여 대의를 생명으로 삼아 조국 광복을 위해 모교의 정신을 그대로 살려 최후 일각까지 투쟁한다”는 설립목적을 분명히 했다. 독립군 양성소의 기능을 담당한 신흥강습소가 자기 울타리를 넘어 연해주와 미주에까지 자신의 존재를 알렸던 것은 바로《신흥교우보》의 발간을 통해서였다. 미국의 안정적인 신문발행에 비하여《신흥교우보》의 발행은 그만큼 여러 가지 장애를 극복해야 하는 여정이었다.
농한기에는 군사훈련과 계몽교육을 실시하는 노동강습소와 노동학교도 경영했으며 자위대를 조직하여 일제의 앞잡이가 침입하는 것을 방지하는 등의 사업에 주력하였다. 신흥학우단은 혁명의 대오에 참가하고 대의를 생명으로 삼아 조국광복을 위하여 모교의 정신을 함양, 최후의 한 시각까지 싸운다는 각오로 활동하였다.
신흥(교우)학우단 본부 터에 대해서는 원병상의 수기에 근거해서 유하현 삼원포 대화사라고 비정하고 있으나《신흥교우보》제2호의 내용에는 합니하를 본부로 하고 있다고 했다.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터인 고려관자 마을로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