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洪範圖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본관
남양(南陽)
이명(별칭)
호: 여천(汝千)
출신지
평남 양덕(陽德)
운동계열
만주방면
포상훈격
대한민국장(2021)
주요 활동
1907년부터 산포수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후치령전투, 갑산읍 점령 등을 비롯하여 수십 차례의 전투에서 연전연승. 1913년 독립군 활동 준비단계로 노령 연해주에서 노동회 조직, 1919년 만세운동 직후 가장 먼저 대한독립군을 조직하여 최초의 국내 진입작전에서 승전. 1920년 6월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승리.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에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독립군과 함께 승리
관련 조직
대한독립군
생애
1868년 8월 27일 평안남도 양덕(陽德)에서 가난한 농부 홍윤식(洪允植)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지에 대해서는 ① 평남 양덕 ② 평북 자성(慈城) ③ 평양 외성리(外城里)의 세 가지 설이 있다.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호는 여천(汝千)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3년간 삼촌댁에서 살다가 부근 지주집의 머슴살이로 들어갔다. 체격이 건장하였고, 어려서부터 성품이 순박하고 겸손하며, 신의가 있고, 의협심과 애국심이 강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1883~1887년 5년간 황해도 수안군(遂安郡) 수구면(水口面) 신현리(新峴里)에서 한지제지소의 수공업 노동자로 일하였다. 1887년 노동자 생활을 그만두고 평양(平壤)의 친군서영(親軍西營, 이후 평양진위대로 개칭)에 자원입대하였다. 정규 군인이 되어 사격술을 배웠다. 그러나 병졸생활은 기대한 것처럼 나라를 지키는 생활이 아니었다. 장교들의 사병에 대한 굴욕적인 학대와 부패에 놀라서 군대생활이 무의미함을 절감하고 3년간 복무한 후 그만두었다. 1891년경 함남 단천(端川)으로 가서 광산노동자가 되었다. 1893년경 삼수(三水)의 산포수대(山砲手隊)에 들어가 사냥꾼이 되었다. 이어서 북청군(北靑郡) 안산사(安山社)로 이사하였는데, 안산사에는 함경도 감영으로부터 공식 승인받은 산포수들이 있었다. 당시 북청군 안산사(安山社)와 안평사(安坪社) 2면의 산포수들은 통칭 ‘안산사 포계(安山社 砲契)’로 알려져 있는 동업조합을 만들어 조직화된 포수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안산사 포계에 가입하여 오래지 않아 포연대장(捕捐大將)에 뽑혔다. 포연대장은 관리들과 교섭하여 포획물의 양을 정하고 이를 세금으로 납부하는 직책이었다. 당시 산포수들은 빈곤했을 뿐 아니라 무기도 대부분 낡은 화승총이었으며 탄약 장비도 열악하였다. 하지만 관청에서는 포수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부과하였다. 안산사 포계의 포연대장으로 관청에서 부과하는 세금의 부담을 덜기 위해 분투하였다. 지방 관리들로부터 위협과 매수 시도를 받았으나, 완강히 투쟁하여 포수들의 세금을 낮추는 데 성공하였다. 이 투쟁을 통해 동료 포수들의 신망을 얻었다. 1893년에서 1907년에 이르는 14년간 삼수·갑산(甲山)·풍산(豐山)·북청 일대에서 포수생활을 했는데, 이 시기는 홍범도의 일생에서 단 한번 단란한 가정생활을 한 시기였다. 아들 용범(龍範)과 용환(龍煥)을 두었는데, 후에 의병무장투쟁을 일으키자 용환을 제외한 부인과 용범 등 가족은 일제에 체포되어 사실상 인질로 이용되었는데, 이때 ‘귀순’을 거부하고 무장투쟁을 계속하자 모두 일제에 의해 사망하였다. 그후 용환은 홍태준(洪泰俊)이라는 이름으로 독립군 병사를 모집하여, 아버지의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하였다. 포수생활을 시작한 직후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이 일어났는데, 후일 “반일 반봉건 의식에 눈을 뜬 것은 동학농민운동 때였다”라고 술회하였다. 갑산에서 포수 생활을 할 무렵, 1907년 8월 1일 일제에 의한 한국군의 군대 해산이 있었고, 9월 7일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이 공포되어, 민간인이 가지고 있는 화승총과 사냥총까지 모두 회수되었다.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의 산포수들에게 “일제가 사냥총까지 거두어 가는 것은 우리 민족을 완전히 무장해제시켜 자기들의 식민지로 만들려는 것이니, 이에 응하지 말고 의병을 일으켜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태양욱(太陽郁) 등 동지들과 함께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의 산포수 및 청년들 200여 명을 규합하여, 1907년 11월 함남 북청의 후치령(厚峙嶺)을 근거지로 의병을 일으켰다. 홍범도 의병부대의 특징은 주로 산포수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 전투력’이 막강한 부대였으며 당시의 의병부대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전투력을 보유한 의병부대였다. 그 결과 홍범도 의병부대는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연전연승하였다. 1907년 11월 22일 의병부대를 이끌고 산포수들의 무기를 회수하기 위해 출동한 일본군 북청수비대를 공격하여 전멸시켰다. 11월 23일 갑산과 혜산진(惠山鎭) 사이에서 일본군 북청수비대가 호송하는 우편마차를 습격하였다. 놀란 일본군 북청수비대는 1개 중대를 토벌대로 파견하였는데, 11월 24일 후치령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이를 섬멸하였다. 이 전투 후 소규모 유격전을 전개하던 중, 1907년 12월 15일 갑산과 북청을 연결하는 도로에서 일본군의 군용 물자 수송대를 습격하여 물자를 노획하고 수송병들을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일제는 북청수비대와 함흥수비대가 합동으로 ‘토벌대’를 구성하여 홍범도 의병부대를 공격하였다. 이때 휘하 의병부대를 차도선(車道善) 의병부대와 통합하여 병력을 400여 명으로 증가시켰으며, 12월 3일 중평장(仲坪場)에서 3시간의 교전 끝에 일본군을 혜산진으로 패주시키는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군은 당시 전국 의병부대들 중에서 홍범도 부대가 최강임을 재확인하고, 북청·함흥(咸興)·성진(城津)의 3개 수비대로 1개 대대를 편성하고 1개 기병 소대까지 포함한 ‘대토벌대’를 편성하여, 삼수에 진을 치고 있는 홍범도 의병부대를 섬멸하기 위해 출동하였다. 홍범도 의병부대는 일본군 대부대에 맞대응하는 것은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유격전법을 택하였다. 삼수에는 1개 소대만 남겨 두고 일본군 토벌대대를 삼수에 묶어 둔 채, 1908년 1월 10일 의병부대 본대가 갑산읍을 기습하여 9시간의 전투 끝에 일본군 갑산수비대를 전멸시키고, 우체국 등 일제 기관을 파괴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날으는 홍범도’라는 별명을 얻었다. 갑산읍을 점령한 후 가급적 전면전을 피하고, 주로 이원(利原)·단천·풍산·갑산·혜산진 일대의 산악 지방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기동성이 매우 뛰어나 일본군은 결코 홍범도 의병부대를 감당할 수 없었다. 일제는 군사 행동만으로는 홍범도 의병부대를 섬멸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리고, 고종과 대한제국 정부의 이름을 빌리고 관리를 보내어 선무공작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1908년 3월 27일 홍범도의 동지 차도선이 직계 부하들을 데리고 귀순함으로써 의병부대의 전력이 약화되었다. 1910년 무렵 탄약이 고갈되어 더 이상 국내에서 싸우기가 어렵게 되자, 그해 3월 소수의 부하 의병들을 데리고 두만강(豆滿江)을 건너 간도(間島)로 이동하였다. 1911년 3월 부장(副將) 박영신(朴永信)이 이끄는 선발대가 국내로 진입하여 일본군 경원수비대를 섬멸시켰다. 하지만 이 전투 후 탄약 고갈로 의병활동이 불가능해지자 의병부대는 해산하였다. 1913년 노령 연해주로 망명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노동회(勞動會)를 조직하고 군자금을 비축하며 때를 기다렸다. 1919년 만세운동이 간도에도 파급되었다. 이 무렵 만세운동이 무장투쟁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독립군을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1919년 3월 21일자 일제 측 자료에 따르면 “홍범도가 독립군을 조직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총기를 구입하고 있다”라고 보고되었다. 그해 5월 북간도에서 의병출신들과 간도 및 노령의 한국 청년 및 산포수들을 모아서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을 창설하였다. 초창기 대원은 약 200명이었다. 같은 해 8월 대한독립군을 이끌고 국내 진입작전을 단행하여 일본군 혜산진수비대를 공격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 독립군 부대의 국내 진입작전 중 최초의 사례였다. 같은 해 9월 함경남도 갑산군에 진입하여 일제 헌병 금정주재소 등 일제 통치 기관을 습격하였다. 10월 평안북도 강계(江界) 만포진(滿浦鎭)을 점령하였으며, 자성군(慈城郡)으로 진출하여 일본군 70명을 처단하였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조사원으로 오동진(吳東鎭)·김응식(金應植) 등을 파견하여 이 승리를 확인하였다. 대한독립군의 최초 국내 진공작전의 승전은 만세운동의 성과를 독립군의 무장투쟁으로 한 단계 끌어올리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간도와 노령 일대에는 독립군단이 속출하였고, 무장투쟁이 독립운동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1919년 겨울 두만강과 압록강(鴨綠江)이 얼어붙자 독립군 부대들이 이듬해 봄까지 끊임없이 국내로 진입하여 일본군을 기습 공격하였다. 대한독립군은 용감히 잘 싸우는 독립군이었으나, 무기와 병참 보급에 곤란을 겪었다. 재정 지원을 받기 위하여 1919년 12월 간도의 교민 단체인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산하로 들어갔다. 당시 대한국민회는 직할군대로 안무(安武)가 지휘하는 국민회군(國民會軍)을 운용하였다. 대한국민회의 지원으로 대한독립군은 무기도 더욱 충실해지고 병력도 300명으로 증가되었다. 1920년 5월 대한독립군은 국민회군 및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와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편성하였다. 이때 대한북로독군부의 북로사령부장을 맡았다. 이 연합의 결과로 약 1,000명의 독립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대한북로독군부가 봉오동(鳳梧洞)에 근거지를 설치하고 있을 때, 국내에 진입한 신민단(新民團) 독립군 소부대를 추격해 온 일본군 1개 대대가 두만강을 건너 봉오동까지 들어왔다. 이때 주민을 철수시키고 독립군을 매복시켰다가, 1920년 6월 7일 봉오동 분지에 들어온 일본군 1개 대대를 포위 공격하여 157명을 처단하고 200명을 부상시키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독립군의 손실은 전사 4명, 중상 1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이 봉오동 전투이다. 봉오동 전투에서 참패한 일본군은 대병력을 투입하여 독립군을 탄압하기 위해 중국군에게 군사적 외교적 압력을 가하였다. 이에 독립군과 중국군이 타협하여 근거지를 산악의 밀림 지대로 이동하였다. 대한독립군은 이도구(二道溝) 어랑촌(漁郞村) 부근으로 이동하였고, 김좌진(金佐鎭)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독립군은 삼도구(三道溝) 청산리(靑山里) 부근으로 이동하였다. 뒤이어 국민회군·의군부(義軍府)·한민회군(韓民會軍)·광복단(光復團)·의민단(義民團)·신민단 등의 독립군부대들도 근거지를 이동하여 대한독립군이 주둔하는 이도구 어랑촌 부근으로 이동하였다. 1920년 10월 일본군 제19사단을 주력으로 하고 제20사단·제11사단·제13사단·제14사단에서 차출한 25,000명과 항공대까지 동원하여 간도를 침공하였다. 이 중 아즈마(東) 지대(支隊)가 이도구와 삼도구를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일본군의 공격에 대처하여 이도구에 모인 대한독립군·국민회군·의군부·한민회군·광복단·의민단·신민단 등의 독립군 부대들은 독립군 연합부대를 편성하였으며, 이때 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연합부대의 실제 전투 병력은 약 1,400명이었다. 한편 삼도구 청산리에 주둔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독립군 600여 명도 전투 준비를 마쳤다. 1920년 10월 21일 오전 9시 삼도구 청산리 백운평(白雲坪)에서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는 일본군 300여 명을 처단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이범석(李範錫)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 연성대(硏成隊)가 특히 큰 전공을 세웠다. 또한 북로군정서는 이도구 갑산촌(甲山村)으로 이동하였다가 천수평(泉水坪)에서 일본군 기병대 전초 중대 120명을 섬멸하였다. 10월 21일 오후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이도구 완루구(完樓溝)에서 직접 독립군 연합부대를 이끌고 포위해 들어오는 일본군 아즈마지대 본대 수백 명을 처단하였다. 이후 어랑촌 서남단 고지에서 북로군정서가 일본군에 포위되어 교전을 전개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달려가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10월 22일 아침부터 이도구 어랑촌 부근에서 김좌진 부대 600명과 홍범도 부대 1,400명 등 독립군 2,000여 명과 일본군 아즈마지대 5,000여 명이 아침부터 저녁 해질 때까지 교전하여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이후 10월 26일 새벽까지 6일간 청산리에서 10여 차례 교전하여 승전을 거두었다. 독립군 130명이 사망하였으며, 일본군 1,200명을 처단하였다. 청산리 대첩 이후 홍범도 부대와 김좌진 부대는 1920년 12월 밀산(密山)에 모였고, 1921년 6월 헤이루장(黑龍江)을 건너 노령 이만으로 갔다가, 자유시 알렉세에스크에서 이른바 자유시 참변을 당하였다. 이르쿠츠크에 있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자유시에 모인 한국독립군 부대들을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에 소속시키고, 사령관에 가란달라시윌린을 임명하였다. 7월 5일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고려혁명군정의회에 바이칼 호수 부근의 이르쿠츠크로 이동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8월 5일 자유시의 모든 한국인 군대는 이르쿠츠크로 수송되었으며, 이때 동료들과 함께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였다. 그해 8월말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고려혁명군정의회를 폐지하고 한국인 부대를 소비에트 적군 제5군단 관할하의 한족여단으로 개편하였다. 당시 노령(老齡)이라는 이유로 다른 노병들과 함께 모스크바 관광에 보내졌다. 1922년 전반기 약간 명의 옛 부하들과 함께 시베리아의 이만으로 돌아갔다. 블라고베시첸스크에서 이동휘(李東輝)·문창범(文昌範) 등과 고려중앙정청(高麗中央政廳)을 조직하였으며, 그해 9월 1일 치타에서 대표자회의를 여는 등 한인사회의 자치활동에 참여하였다. 1922년 10월 모스크바정부의 외교교섭으로 일본군은 시베리아에서 철수하였다. 그해 12월 30일 스탈린 정부는 제1회 전연방 소비에트대회를 열고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출범시켰으며, 이때 연해주도 통치구역에 편입되었다. 그 결과 1923년 1월부터 소련 영토 내에서 한국인의 무장활동이 사실상 금지되었다. 1923~24년경부터 이만에서 옛 부하들과 함께 집단농장을 경영하면서 독립군의 재기 기회를 기다리다가, 1926년경 중병에 걸리기도 하였다. 1937년 스탈린 정부는 시베리아 일대에 거주하는 모든 한국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때 20~30만의 한국인과 함께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어, 현재의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 지방에 정착하여 집단농장을 개척하였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73세의 나이로 정규군으로 참전을 자원했다가 거절당하였다. 자신이 싸울 힘과 유연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사격장에 사람들을 불러 모아놓고 25m 떨어진 거리에서 동전을 명중시켰다. 이 무렵 크질오르다에서 활동하던 소련 한인극단을 찾아가 연극 극단의 물품 돌보는 일이라도 시켜달라고 부탁하였다. 극단의 희곡작가 태장춘은 독립군의 무장투쟁을 주제로 한 희곡 ‘홍범도’를 창작하여 소련 중앙아시아 한인극단에서 공연하였다. 희곡 창작과정에서 태장춘에게 자신의 영웅적 행동보다는 전우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고 사실을 본래 그대로 묘사해 주기를 주장하여, 연극에 알맞게 사실을 옮기려는 태장춘이 적지 않은 어려움에 부딪쳤다고 한다. 1943년 10월 25일 75세의 나이로 크질오르다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21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년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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