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재룡 禹在龍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본관
단양(丹陽)
이명(별칭)
자 : 이견(利見), 호 : 백산(白山), 이명 : 우리견(禹利見)·우경옥(禹敬玉)·김경옥(金景玉)·김재수(金在洙)·김재서(金在瑞)·김상호(金尙浩)·김한조(金漢朝)
출신지
경남 창녕(昌寧)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훈격
독립장(1963)
주요 활동
한말 의병운동(산남의진), 1910년대에 국내외에서 대한광복회·주비단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 및 친일파 처단 활동
관련 사건
정미의병(산남의진), ‘광복회원 우리견(禹利見) 사건’, 군자금 모집, 친일파 처단, 대한광복회 사건, ‘경북 우편마차 암습사건(暗襲事件)’, 영월 중석광 공격 사건, 주비단 사건
관련 조직
산남의진(山南義陣), 조선국권회복단, 대한광복회, 지린광복회(吉林光復會), 주비단(籌備團)
생애
1884년 1월 3일 경상남도 창녕군(昌寧郡) 대지면(大池面) 왕산리(旺山里)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단양(丹陽)이며, 자는 이견(利見), 호는 백산(白山)이다. 이명으로 우리견(禹利見)·우경옥(禹敬玉)·김경옥(金景玉)·김재수(金在洙)·김재서(金在瑞)·김상호(金尙浩)·김한조(金漢朝) 등을 사용하였다. 출생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경북 청도군(淸道郡) 풍각면(豊角面)으로 이주하여 5년 동안 살았으며, 일곱 살 되던 해에 다시 청송군(靑松郡) 유전(楡田, 현 청송군 현서면 무계리)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다시 영천(永川)으로, 다시 대구부(大邱府) 성서면(城西面) 신당리(新堂里)로 이주하여 살았다. 본적지는 경북 경주군(慶州郡) 외동면(外東面) 녹동(鹿洞)이었고, 1921년 당시 주소지는 서울 효자동(孝子洞)이다. 청송에서 처음 글공부를 시작하였으나, 한말에 무과(武科) 벼슬을 했던 부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무관(武官)에 관심이 많았다. 1902년 대한제국 군대 대구진위대(大邱鎭衛隊)에 입대하여,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으로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될 때까지 참교(參校)로 5년간 복무하였다. 이 무렵 대구감옥에 붙잡힌 의병장 정용기(鄭鏞基)를 만나 크게 공감하여 서로 의형제를 맺으면서, 이후 항일운동으로 삶의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다. 정용기는 당시 고종(高宗)의 측근에서 일하던 부친 정환직(鄭煥直)의 명을 받고 1905년 12월부터 고향인 경북 영천에서 의병을 모집하기 시작하였다. 1906년 3월 영천에서 ‘산남의병(山南義兵)’을 설치하고 봉기했으며, 이후 영남지방 전체에 걸쳐 의병을 조직하였다. 1907년 군대해산을 맞은 상황에서 정용기가 의병을 모집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자, 그 해 (음)7월 일부 군인들과 함께 무기를 빼돌려 청송의 산남의병을 찾아갔다. 산남의병은 산악지대를 이용해 북쪽으로 올라가 강원도를 거쳐 서울로 가서 일본군과 일전을 벌인다는 목표를 가지고 거병한 것이었다. 1906년 9월 감옥에서 나온 정용기는 1907년 4월 다시 산남의병을 편성하였으나 북상(北上)에 많은 어려움이 있어 그 해 7월에야 북상을 시작할 수 있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산남의병에 합류한 것이었다. 의병에서는 연습장(練習長)을 맡아 의병들에게 근대적 군대 경험을 전수하였다. 그리고 합류한 직후인 같은 해 (음)7월 12일부터 북상을 위해 영덕군 영해면(寧海面) 방면으로 진군을 시작하여, (음)7월 17일 청하(淸河) 전투에 참여하였다. 300여 명의 의병부대와 함께 청하읍을 공격하여 직접 조선인 순사 박내호(朴來鎬)를 처단하고 분파소(分派所)와 가옥 2채를 소각하고 무기를 취득하는 등의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 몇 차례 공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산악지대를 이용하여 유격전을 준비하였다. 같은 해 8월 24일 일본군이 자양면(紫陽面) 쪽으로 이동한다는 정보에 따라 산남의병에서는 부대를 둘로 나누어 일본군을 공격하기로 했는데, 이때 선봉을 맡아 월연동(月淵洞)에서 일본군 1명을 처단하는 등의 성과를 올렸다. 1907년 10월 7일 입암(立巖, 현 포항시 북구 죽장면) 전투에서 대장 정용기 비롯해 다수의 의병장이 전사하는 큰 타격을 입으면서 산남의병은 해산 위기에 처하였다. 이때 직접 선봉장으로 나서서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이세기(李世紀)·남석술(南錫述) 등과 함께 정용기의 부친인 정환직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여 의병을 재편성하는 데 앞장섰다. 이리하여 산남의병은 청송의 보현산(普賢山)과 영일의 동대산(東大山) 일대를 중심으로, 다시 분파소를 공격하고 일본군을 처단하는 등 경북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일 수 있게 되었다. 이때에도 선봉에 서서 흥해(興海)·신영(新寧)·서암(西岩) 등지에서 전과를 올렸다. 같은 해 11월 16일에는 수장(首將) 정완생(鄭完生) 밑에서 부장(副將)을 맡아 흥해군 신광(神光)의 분파소를 불태우고 직접 일본인 순사와 조선인 순검 1명씩을 처단하는 등 여러 지역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1907년 12월 7일 전투 중에 정환직마저 사망하자, 최세윤(崔世允)이 새로 산남의병의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최세윤은 북상 계획을 중단하고 지구전으로 전략을 수정한 후, 경상도 일대에 각 책임자를 정하고 소부대로 흩어져 유격전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이때 영천 서부지역의 책임을 맡아 70여 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동화사(桐華寺)를 근거지로 하여 팔공산(八公山) 일대를 중심으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각지로 흩어진 산남의병은 1908년 2~7월에 걸쳐 경북 일대에서 일본군과 20여 차례의 전투를 벌였으나, 7월에 대장 최세윤을 비롯한 다수가 붙잡히면서 활동이 중단되었다. 이 무렵 무기 구입을 위해 대구로 잠입했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같은 해 9월 14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내란죄·강도죄 등으로 종신 유형을 받았다. 이날 함께 재판을 받은 김도진(金道秦)은 유형 5년을 받았다. 재판 당시의 이름은 우경옥(禹敬玉)으로, 본적 및 주소는 대구군 성서면 신당리로 기재되어 있다. 일제의 강제병합 직후인 1911년 이른바 ‘은사령(恩赦令)’에 따라 ‘합방특사(合邦特赦)’로 풀려났다. 고향으로 돌아가 보니 그 사이에 부친과 처자가 모두 사망한 상황이었다. 이후 경산군 하양(河陽)의 조(曺) 씨와 다시 결혼하여 그곳에 살다가 일제의 감시가 심해져서 김천군 지례(知禮)로 이주하였다. 그곳은 감옥에 있을 때 만나 존경심을 갖게 된 오사로(吳士老)가 있는 곳이었다. 오사로로부터 ‘이견’이라는 자를 받고, ‘우리견’이라고 불렀다. 김천의 오사로에게 가족을 맡기고 다시 영남지방으로 가서 활동을 모색하던 중 경주에서 박상진(朴尙鎭)을 만났다. 당시 경주에 거주하던 박상진은 산남의병에서 함께 활동했던 양제안(梁濟安)의 소개로 직접 찾아와 함께 활동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때부터 만주를 오가며 함께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조직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으며, 1914년에는 가족들을 모두 경주 녹동의 박상진 집으로 이주시켰다. 이 무렵부터 대한광복회 본부로 사용되었다고 알려져 있는 총사령 박상진의 집에서 함께 거주하였다. 대한광복회가 결성된 직후에는 경북지역의 자산가 현황을 조사한 조사서를 가지고 만주로 가서 광복회 이름으로 이들에게 포고문을 발송하는 활동을 하였다. 비밀결사 대한광복회는 1915년 (음)7월 15일 대구의 달성공원에서 조직되었다. 원래 1913년 12월경 경북 영주군 풍기면(豊基面)에서 채기중(蔡基中)의 주도로 결성된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 일명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을 모체로 한 조직이었다. 여기에 박상진 등이 주도했다고 알려져 있는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回復團)의 일부 인사들이 합세하여 대한광복회로 확대 발전된 것이었다. 1915년 1월 15일 대구 안일암(安逸菴)에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은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한 혁신유림세력이 국권회복운동과 단군봉사(檀君奉祀)를 목적으로 조직한 단체였는데, 원래 1908년 대구에서 결성된 달성친목회(達城親睦會)와 1912년 대구에 설립된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 등에 그 연원을 두고 있었다. 조선국권회복단이 결성될 때부터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박상진·양제안·권영만(權寧萬)·정운일(鄭雲馹)·엄정섭(嚴正燮)·김경태(金敬泰)·김한종(金漢鍾) 등과 함께 대한광복회 결성으로까지 이어진 것이었다. 대한광복회의 창립 목적은 국권 회복과 독립 달성을 위해 만주에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고 독립군을 양성하여 무력이 준비되면 일제와 전쟁을 치른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한인들을 만주로 이주시키고 농토를 개간해 식량과 병력을 공급할 계획도 세웠으며, ‘무력준비·무관양성·군인양성·무기구입·기관설치·무력전’이라는 투쟁 방략을 세우고 군대식으로 조직을 편재하였다. 이를 위해 먼저 국내에서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의 독립군 기지로 보내고, 또 국내에 확보한 기지를 거점으로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하였다. 구체적인 행동지침으로는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강령을 두었으며, 활동의 거점으로 각지에 곡물상(穀物商)을 설립하였다. 이러한 목표와 실천강령을 갖고 있던 대한광복회에서 국내와 국외 조직의 연락책임을 맡아 활동하였다. 대한광복회가 정식으로 결성되기 전부터 박상진과의 협의 아래 서로 역할을 분담하여, 계속 만주를 오가며 이미 거점을 마련하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광주·목포 등지에 독립군 연락기지를 건설하고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활약하였다. 대한광복회는 본부에 일정한 조직적 편제를 갖춤과 동시에 전국 각지에 지부를 설치했는데, 사령관 박상진 밑에서 권영만과 함께 지휘장(指揮長)을 맡아 활동하였다. 경상도지부장은 채기중, 충청도지부장 김한종, 전라도지부장 이병찬(李秉燦), 경기도지부장 김선호(金善浩), 함경도지부장 최봉주(崔鳳周), 평안도지부장 조현균(趙賢均), 황해도지부장 이해량(李海量), 강원도지부장 김동호(金東浩) 등이 각각 담당하였다. 대한광복회의 지휘장으로 권영만과 함께 1915년 12월 경주에서 대구로 운송되는 세금을 실은 우편마차를 공격하여 8,700원을 탈취한 ‘경북 우편마차 암습사건(暗襲事件)’을 주도하였다. 당일 우편마차를 정지시키기 위해 미리 경주 광명리 효현교(孝峴橋)를 부수고서 마차를 기다렸다가 세금을 빼돌리는 데 성공하였다. 당시 경찰은 이 사건의 파장을 우려하여 비밀리에 수사를 했지만, 그 배후를 밝힐 수 없었다. 1916년에는 권상석(權相錫)·임봉주(林鳳柱) 등과 함께 경북 칠곡(漆谷)의 친일 부호(富戶)로 유명한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또 같은 해 10월 군자금 모집을 위해 대한광복회와 민단조합(民團組合)이 함께 준비한 것으로 보이는 영월(寧越)의 일본인 중석광(重石鑛) 공격을 위해, 지휘장으로서 미리 그해 (음)4~5월부터 풍기의 채기중 집에 머물면서 영월의 중석광을 탐문하였다. 그러던 중 총사령 박상진이 1916년 무기 반입을 위해 만주를 다녀오다가 서울에서 일제 경찰에 붙잡힘으로 인해, 대한광복회의 활동은 약 1년 정도 위축되었다가 1917년에 박상진이 풀려나면서 다시 재개되었다. 1917년 (음)10월 서울 어재하(魚在河)의 집이나 인천 이경순(李敬淳)의 집에서 장두환(張斗煥)에게 권총 등을 교부하여 군자금을 모집하고 부일배(附日輩)를 처단하도록 했다. 한편 대한광복회에서는 만주에서도 동지를 규합하고 활동의 거점을 마련하였는데, 이때 만주로 파견되어 안둥(安東)에 상주하면서 활동하였다. 1915년 12월 영주에서 대동상점(大同商店)을 운영하던 권영목(權寧睦) 등이 제공한 비용으로 만주 지린성(吉林省)에서 손일민(孫一民)·주진수(朱鎭洙)·양재훈(梁載勳)·이홍주(李洪珠) 등과 함께 광복회를 조직하였다. 영주의 대동상점은 대한광복회의 주요거점이자 자금창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대한광복회 만주 조직의 사령관은 처음에는 이석대(李奭大)가 맡았으며, 나중에 평양 은산금광(殷山金鑛)에서 이석대가 검거되자 신임 사령관을 김좌진(金佐鎭)을 직접 추대하여 사령관을 맡게 하였다. 만주의 대한광복회 거점은 안둥의 안동여관(安東旅館)에 손회당(孫晦堂), 펑톈(奉天)의 삼달양행정미소(三達洋行精米所)에 정순영(鄭淳榮) 등이 책임을 분담하고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한광복회에서는 만주의 주요 지역에 지점이나 여관 또는 광무소(鑛務所) 등을 두어 연락기관으로 삼는다는 방침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실천한 결과인 것이다. 만주 지린의 광복회를 중심으로 대한광복회 본부와 서간도의 부민단(扶民團)·신흥학교(新興學校) 등과 연계하여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지원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과거 산남의병에서 함께 활동하다가 1912년 만주의 반석현(盤石縣)으로 건너간 이순구(李純久)를 광복회에 가입시키는 등 동지의 규합에도 힘썼다. 또한 만주에 있으면서 여러 차례 김재창(金在昶) 등과 함께 국내의 자산가들에게 군자금 수합을 위한 통문(通文)을 발송하고 이들을 처단하기 위한 무기를 조달하였다. 1917년 (음)8월 서울 어재하의 집에서 박상진·손일민·김한종·장두환·김동호(金東鎬) 등과 회합을 갖고 논의한 끝에, “국권을 회복하여 조선 영토 내에서 독립국을 형성”한다는 취지로 광복회 명의의 포고문을 작성하였다. 이를 중국의 손일민 집으로 가져가서 한글로 번역하고 수십 통을 복재한 후 국내 각지의 자산가들에게 우편으로 발송하였다. 예컨대 1917년 채기중·강순필(姜順必) 등이 칠곡의 부호 장승원 처단에 성공했을 때, 또 1918년 도고면장(道高面長)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했을 때 보낸 포고문이나 권총 등의 무기도 바로 만주에서 발송되고 조달된 것이었다. 이처럼 1917년 전국적으로 송달되어 주목을 끌었던 대한광복회의 포고문과 격문은 거의 다 만주에서 발송한 것이었다. 이렇게 만주로 가져가서 국내로 포고문을 발송하는 활동은 1915년 대한광복회 결성 직후부터 지속적으로 수행해오던 임무였다. 대한광복회는 결성 초기부터 비밀유지를 위해 국내에서 작성한 부호의 명단과 포고문을 만주까지 가져가서 그곳에서 발송하였다. 1917년 시기의 포고문 발송은 크게 두 차례에 이루어졌다. 1차는 1917년 6월부터 채기중이 경상도의 자산가를 조사하여 작성한 「경상북도 15군 조사기」를 근거로 그해 8월 말 신의주와 중국 안둥현 등에서 이를 발송하였다. 2차는 박상진을 통해 엄정섭·김한종·장두환이 작성한 충청도 자산가 명단과 강원도 지부장 김동호가 작성한 강원도 자산가 명단을 건네받아, 같은 해 12월 말부터 이듬해인 1918년 1월 초에 걸쳐 중국 안둥·펑톈 등지에서 충청도로 20통, 강원도로 3통을 발송하였다. 1918년 8월경 단원 이종국(李鍾國)의 밀고로 대한광복회 조직이 발각되어 다수의 동지들이 검거되었을 때 경기도 경찰부에 붙잡혔으나, 다행히 탈출하여 만주로 몸을 피하였다. 남아 있던 동지 권영만·한훈(韓焄) 등과 함께 대한광복회의 조직 회복에 주력하였다. 그러던 중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여 이를 지원하기 위해 그 해 6월 서울 경신학교(儆新學校)에서 결성된 비밀결사 주비단(籌備團)에 참여하였다. 주비단에는 한말의 고관(高官)이었던 이민식(李敏軾)을 위시하여 심영택(沈永澤)·장응규(張應奎)·안종운(安鍾雲)·여준현(呂駿鉉) 등이 참여했으며, 단장은 심영택, 부단장은 안종운이 맡았다. 1919년 (음)8~9월경 주비단 활동의 일환으로 논산 안종운의 집에서 권영만·소진형(蘇鎭亨)·이재환(李載煥) 등과 함께 군자금 모금을 계획하고,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공채증서(公債證書)를 매각하는 활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하였다. 만주 ‘지린성군정서(吉林省軍政署) 총사령관’ 명의로 된 「군자금 모집 통고서(通告書)」 19통을 작성하여, 논산군 내 김재엽(金在燁)·김유현(金裕鉉)·김철수(金哲洙)·윤일병(尹一炳)·윤지병(尹志炳) 등의 부호들에게 보내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인 끝에 6천여 원을 모금하였다. 이렇게 모금된 자금을 서울 수송동(壽松洞) 이관주(李觀柱) 집에서 임시정부의 특파원인 김일규(金一圭)에게 전달하여 임시정부의 군자금으로 활용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서울과 논산·군산 등지를 오가며 활동하던 중 1921년 5월 군산에서 일제 경찰에 검거되어 모진 심문과 고문을 당하였다. 같은 해 12월 22일 예심이 종결되어 공판에 회부되었다. 1922년 4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등으로 무기징역을 받았다. 1937년 감형되어 풀려나기까지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 옥중에서 얻은 지병이 깊어서 권영만 등의 지원을 받으면서 살아가던 중, 1945년 광복을 맞았다. 같은 해 12월 서울에서 권영만·이관구(李觀求) 등과 함께 대한광복회를 재건하고 부회장을 맡았다. 독립운동 유적지를 정화하는 사업에 전념하다가, 1955년 3월 3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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