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동 崔敬東

국내항일 애족장(1990) 내국인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이명(별칭)
창씨명 : 진산경동(津山敬東)
출신지
전남 함평(咸平)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훈격
애족장(1990)

주요 활동

1919년 독립만세시위, 1942년 배일(排日) 연설

관련 조직

없음

생애

1901년 9월 5일 전라남도 함평군(咸平郡) 나산면(羅山面)에서 태어났다. 일제의 창씨명 강요로 진산경동(津山敬東)을 썼다. 어려서부터 기독교 신자였으며, 미국인이 경영하는 광주(光州) 사립 숭일학교 중등과를 졸업하고 미국인 선교사 윌슨에 의해 광주 나병원 조수가 되었다. 이후 3년 동안 의학을 공부하여 1925년 10월 충청남도 한지(限地) 의사시험에 합격한 후 의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광주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42년 여수(麗水) 애양원(愛養園)에서 배일(排日) 연설을 하였다. 1919년 3월 10일 광주제중원 서기로 재직 중에 광주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광주 만세운동은 수피아학교·숭일학교와 광주제중원 등 기독교 연합 세력이 주도하였고, 목포(木浦)·영암(靈巖) 등지의 만세운동에도 영향을 끼침으로써 전남 지역 만세시위의 촉진제 역할을 하였다. 이 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같은 해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그해 8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이후 1941년 여수의 나환자 수용소인 애양원의 원장 윌슨의 초빙을 받아들여 애양원 전속의사로 근무하였다. 1942년 5월 9일 애양원 교회당에 원생을 포함한 100여 명의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일제가 전쟁에서 패할 것임을 이야기하며 우리나라의 독립이 멀지 않았음을 역설하였다. 그 이후로도 여러 차례 선전활동을 통해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1942년 8월 7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불경죄로 금고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판결문」, 광주지방법원, 1919. 4. 30. ;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19. 8. 13. ; 「판결문」, 광주지방법원, 1942. 8. 7. ; 김승학, 『한국독립사』 하, 독립문화사, 19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