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평완 張平完

국내항일 건국포장(2007) 내국인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출신지
전남 여수(麗水)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훈격
건국포장(2007)

주요 활동

여수사회과학연구회, 여수청년전위동맹, 여수적색노동조합준비회에서 활동

관련 사건

여수적색노동조합준비회

관련 조직

여수사회과학연구회, 여수청년전위동맹, 여수적색노동조합준비회

생애

1908년 9월 9일 전라남도 여수군(麗水郡) 여수읍(麗水邑) 서정(西町)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여수사회과학연구회(麗水社會科學硏究會)·여수청년전위동맹(麗水靑年前衛同盟)·여수적색노동조합준비회(麗水赤色勞動組合準備會) 등에서 활동하였다. 1925년 3월 여수보통학교(麗水普通學校)를 졸업한 후 약 1개월간 일본 오사카(大阪)에 갔다가 여수로 돌아와 1926년 2월부터 읍내에 있는 해운대리점[(回漕店)]에 근무하다가 1927년 2월 이후 농업에 종사하였다. 노동자와 농민으로서 험난한 삶을 살던 중 1929년 중반 여수보통학교 동창 여운종(呂運鍾)의 외숙부인 공산주의자 여도현(呂道鉉)의 지도 하에 『사적유물론(史的唯物論)』, 『신노농당수립제안』 등 수십 권의 좌경 문서를 열독 연구하여 제국주의 체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게 되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1929년 8월 상순 김용환(金龍煥)·여운종 등과 회합하여 여도현의 지도 하에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고 공산주의사회 실현을 위해서 독서회를 조직해야 한다는 조언에 따라 마르크스주의 함양과 보급을 기할 것과 건전한 전위 투사가 될 것을 강령으로 하는 독서회를 조직하였다. 여도현을 지도자로 선출하였다. 빈곤하게 살 수밖에 없는 무산자의 현실을 비판하며 불평등한 사회제도를 타파하고자 사회주의 연구를 진행해갔다. 1930년 8월 독서회의 지도체계에 불만을 품고 별도로 봉산리(鳳山里) 의암산(義岩山)에서 오우홍(吳宇鴻)·김인식(金仁植)·박희봉(朴熙奉) 등 수명과 협의하여 독서회와 동일한 목적을 가진 여수사회과학연구회를 조직하였다. 지도자는 박희봉이 담당하였으며, 이때 회계에 선정되어 재정사무를 담당하였다. 공산주의 이론연구 및 조직 확대에 노력하는 한편 러시아혁명기념일에 기념식을 하는 등 사상 강화에 적극적이었다. 1931년 들어서는 더욱 적극적인 반제국주의 투쟁을 위해 기존의 연구회를 해체하고 여수청년전위동맹을 조직하여 책임자가 되었다. 책임자로서 여수지역이 신흥공업지대로 부상하며 각종 노동조합이 결성되었지만, 각 조합의 열의가 부족하고 단결력이 떨어진다고 판단하며 더욱 강건한 적색노동조합 결성을 추구해갔다. 1932년 7월에는 이창수(李昌洙)·김용환·박채영(朴采永) 등과 여수적색노동조합준비회를 조직하였다. 여수적색노동조합준비회는 각 공장 분회를 기초로 산업별 조합을 구성하기 위해 항만·정미업·교통 등의 산업별로 조직을 정비해갔다. 이때 철공노동부(鐵工勞動部)의 책임자가 되어 노동자의 의식 함양과 권리보호를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노동자를 비롯하여 일반 대중의 투쟁의식을 제고하기 위해 힘쓰다가 1933년 5월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7개월 조사 후 1934년 1월 광주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1936년 6월 29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중 2년 본형 산입)을 받고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수형인명부」. ; 『조선중앙일보』, 1934. 1. 31, 1935. 5. 31. ; 『동아일보』, 1934. 1. 31, 1936. 5. 5, 6. 12, 7. 1. ; 『매일신보』, 1936. 7.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