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태 金敬太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본관
김해
이명(별칭)
김경태(金京太)
출신지
전남 완도(莞島)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훈격
애족장(1990)
주요 활동
전남운동협의회재건위원회와 조약도 ML회건설준비공작그룹을 조직하여 반제독립운동
관련 조직
전남운동협의회재건위원회, 조약도 ML회건설준비공작그룹
생애
1915년 2월 20일 전라남도 완도군(莞島群) 고금면(古今面) 장룡리(藏龍里)에서 김춘선(金春先)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이고, 이명은 김경태(金京太)다. 1931년 3월 약산(藥山) 사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였다. 1934년 6월 중순경 고금면 장용리에서 박천세(朴千世)·이영식(李永植)·정문두(鄭文斗)·정병래(鄭炳來)·정병생(鄭炳生)·정부균(鄭富均)·정후균(鄭後均) 등 8명의 동지와 함께 사회주의 비밀 결사 전남운동협의회재건위원회(全南運動協議會再建委員會)를 조직하여 일제의 민족 탄압과 식민지 노예화에 항거하는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전남운동협의회재건위원회 조직 당시 채택한 운동 방침은 절대 비밀주의, 그룹 회원의 거주 마을을 중심으로 한 하부 조직 결성이었다. 운동 방침은 월 1~2회 책임자가 그룹 회원을 대상으로 외보(外報) 강좌를 하여 정세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이를 다시 하부 조직의 반원들에게 전달한다는 것이었다. 10월 하순경 전위그룹을 청년반으로 명명하고, 청년반원을 책임자로 한 농민반을 각 마을마다 두었다. 이에 따라 구성리 서구 농민반을 맡아 이끌었는데, 반원은 박한세(朴漢世)·정병기(鄭炳基)·정석추(鄭石秋)였다. 1936년 청년반 조직이 개편되면서 선전부와 죽선리 농민반을 맡았는데 김영진·장정돈 외 3명이 반원이었다. 1938년 5월 청년반은 광범위한 운동과 많은 동지를 확보하고자 ‘조약도(助藥島) ML회건설준비공작그룹’을 조직하고 호남 전역에 확산시키기 위해 『뉴스』를 발간하였다. 또한, 각 부서를 두고 책임자를 정하였는데, 이때 선전부를 맡아 활동하였다. 1938년 10월 경찰에 의해 관산리 노동 야학 운동을 하던 곽사길(郭士吉) 등이 잡히고, 곽사길에 연결되어 있던 정후균이 체포되면서 조약과 ML회건설준비공작그룹의 조직이 노출되어 대부분의 조직원이 붙잡히게 되었다. 조직원 14명이 검찰에 구속 송치되었고, 박천세·이영식·정문두·정병래·정병생·정후균 등 전위 그룹인 청년반원 7명과 함께 기소되었다. 1941년 8월 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옥고를 겪던 중 목숨이 위중하여 보석으로 출감하였으나, 집에 도착하자마자 곧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판결문」, 광주지방법원, 1941.8.6. ; 『매일신보』 1939.9.15, 1941.7.27. ; 지수걸, 「일제하 전남 완도·해남지역의 농민조합운동 연구」, 『역사교육』 49, 1991. ; 김점숙, 「1930년대 전남지방 혁명적 농민조합운동 연구」, 『전남사회운동사연구』, 한울, 1992. ; 박찬승, 「일제하 조약도의 항일민족운동」, 『도서문화』 12,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