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김달하 처단지
위치 정보
주소 (한글)
베이징시 동성구 동연점호동 21호 일대
주소 (현지)
北京市 东城区 车辇店胡同 21号 일대
역사적 의의
1925년 다물단이 밀정 김달하를 처단한 곳
설명
1867년 평북 의주 출신인 김달하(金達河)는 베이징 이주 전 이승훈(李昇勳)·안창호 등과 어울려 다니면서 ‘관서의 인물’로 알려졌다. 1893년 외아문(外衙門) 주사(主事)로 임명되면서 원세개(袁世凱)와 친분이 생겨 베이징으로 이주했다. 단기서(段祺瑞)가 대일차관(對日借款)을 교섭할 때 공을 세워 ‘부관(副官)’으로 여겨질 만큼 신임을 얻었다. 이에 베이징 정부의 육군참모부 참사(參事)가 되어 한인 유력자로 대접받았다.
김달하는 베이징 한인사회에서 유력한 인물이었으나 한편으로 조선총독부의 밀정 노릇을 하였다. 밀정혐의는 베이징에서 활동하던 김창숙에 의해 확인되었다. 1922년 4월, 김창숙은 기독교청년대회 참석차 베이징을 방문한 이상재(李商在)와 김활란(金活蘭)을 통해 김달하를 알게 되었다. 한학에 조예가 깊고 경사(經史)에도 밝았던 김달하와 토론을 자주하면서 친분이 생겼다. 그러나 어느 날, 김달하로부터 독립운동가의 처지를 동정하는 말과 함께 총독부의 경학원(經學院) 부제학(副提學) 자리를 제의받았다. 이 때, 밀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동지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김달하 처단을 주도한 것은 다물단이었다. 다물단은 아나키스트 계열의 조직으로 ‘악분자 소탕’을 통해 민족정기의 회복과 독립운동의 장애물 제거에 목적을 두었다.
1925년 3월 30일 단원인 이종희(李鍾熙)·이기환(李箕煥)은 안정문(安正門) 내 차련호동(車輦胡同) 서구내로(西口內路) 북문패(北門牌) 23호의 자택에서 김달하를 교살(絞殺)하였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김창숙은 “결국 다물단원들이 그를 처단했다”는 표현 이외에 자세한 경위와 관계자 신원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또한 이규창은 회고에 사촌인 이규준(李圭俊)이 이규숙(李圭淑)과 김달하 딸인 김유옥(金幽玉)과 친구인 것을 알고 집안사정을 탐지한 뒤 동지들과 함께 결행한 거사였다고 하였다. 이 일로 인해 이규숙은 중국 공안국에 연행되어 조사받고 구류되었다가 풀려났다.
김달하를 처단한 그의 집은 ‘차련호동(車輦胡同)’ 일대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 그 골목은 찾기 어렵다. 이규창의 회고를 통해 김달하의 거주지를 추정해 보면 경사제1중학교 (현재 북경시제1중학)와 관음사호동(현재 전영강호동)의 중간에 위치한 ‘차련점호동(車輦店胡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차련점호동 일대도 많은 변화가 있어 옛 모습을 찾아보긴 힘들다. 현재로서는 거리 전체를 사적지로 비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김달하는 베이징 한인사회에서 유력한 인물이었으나 한편으로 조선총독부의 밀정 노릇을 하였다. 밀정혐의는 베이징에서 활동하던 김창숙에 의해 확인되었다. 1922년 4월, 김창숙은 기독교청년대회 참석차 베이징을 방문한 이상재(李商在)와 김활란(金活蘭)을 통해 김달하를 알게 되었다. 한학에 조예가 깊고 경사(經史)에도 밝았던 김달하와 토론을 자주하면서 친분이 생겼다. 그러나 어느 날, 김달하로부터 독립운동가의 처지를 동정하는 말과 함께 총독부의 경학원(經學院) 부제학(副提學) 자리를 제의받았다. 이 때, 밀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동지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김달하 처단을 주도한 것은 다물단이었다. 다물단은 아나키스트 계열의 조직으로 ‘악분자 소탕’을 통해 민족정기의 회복과 독립운동의 장애물 제거에 목적을 두었다.
1925년 3월 30일 단원인 이종희(李鍾熙)·이기환(李箕煥)은 안정문(安正門) 내 차련호동(車輦胡同) 서구내로(西口內路) 북문패(北門牌) 23호의 자택에서 김달하를 교살(絞殺)하였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김창숙은 “결국 다물단원들이 그를 처단했다”는 표현 이외에 자세한 경위와 관계자 신원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또한 이규창은 회고에 사촌인 이규준(李圭俊)이 이규숙(李圭淑)과 김달하 딸인 김유옥(金幽玉)과 친구인 것을 알고 집안사정을 탐지한 뒤 동지들과 함께 결행한 거사였다고 하였다. 이 일로 인해 이규숙은 중국 공안국에 연행되어 조사받고 구류되었다가 풀려났다.
김달하를 처단한 그의 집은 ‘차련호동(車輦胡同)’ 일대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 그 골목은 찾기 어렵다. 이규창의 회고를 통해 김달하의 거주지를 추정해 보면 경사제1중학교 (현재 북경시제1중학)와 관음사호동(현재 전영강호동)의 중간에 위치한 ‘차련점호동(車輦店胡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차련점호동 일대도 많은 변화가 있어 옛 모습을 찾아보긴 힘들다. 현재로서는 거리 전체를 사적지로 비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