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레네첸스크 이만전투 추도비

러시아 기념비

위치 정보

주소 (한글)
연해주 달리네레첸스크 이만역 서남쪽 근처
주소 (현지)
이만전투지- Россия, Дальнереченск, Станция Дальнереченск-1 일대 / 이만전투 추도비-Россия, Приморский край, Дальнереченск улица Светлая 와 улица Киевская 사이의 공터

역사적 의의

이만전투에서 전사한 고려의용군을 추도하기 위하여 이만역 근처에 세워진 추도비

설명

1920년 러시아 극동지역은 원동공화국과 임시프리아무르정부가 대치하고 있었다. 원동공화국은 중앙의 소비에트정부와 연결되어 있었고, 임시프리아무르정부는 일본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원동공화국은 연해주에서 일본군의 철병을 요구하며 교섭을 시작했다. 이를 위해 먼저 임시프리아무르정부와 중립지대를 설치했다. 중립지대는 원동공화국 관할에 있던 최남단 도시인 이만(Iman, 현재 달레네첸스크) 부근이었다. 이만 남쪽의 아르세니예프카(Arsenyevka)강을 경계로 적군(인민혁명군)과 백군이 대치하였다.
이어 원동공화국은 일본과 협의를 위해 1921년 8월 26일부터 대련(大連)회담을 개최하였으나 쉽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한편, 한인부대는 연해주 이만을 근거지로 집결하였다. 이곳은 한인농촌들이 많아 주둔에 유리했다. 1921년 6월 일어난 자유시참변으로 각지로 분산되었던 상해파계열의 한인부대원이 집결하였다. 이들은 여러 차례에 나뉘어 밀산(密山)을 거쳐 군비단(軍備團) 군사부 본부가 위치하고 있는 이만으로 집결했다. 여기에 사할린부대도 자유시참변을 피해 이곳으로 왔다. 한인부대원들은 인근 마을에 분산 주둔하였다. 이만지역에서 한인부대가 군조직을 재정비 하던 중 백군인 메르쿨로프(Merkulov)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1921년 12월 1일 인민혁명군은 백군이 침입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고려혁명의용군에 출동을 요청하였다. 1921년 12월 2일에 일본군과 백군 육군대장 몰차노프는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고려의용군사의회는 회의를 열어 전투에 참가할 것을 결정하고 1921년 12월 2일 적군과 함께 이동하였다.
우수리강에 도착한 고려의용군에게 곧 철수 명령이 내려졌다. 당시 고려의용군은 3개중대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제1·제3중대는 인민혁명군과 함께 이만으로부터 비킨(Bikin)으로 철수하였다. 그렇지만 한운용이 지휘하는 제2중대는 본진과 연락이 끊겨 남게 되었다.
고려의용군 제2중대는 본진을 따라 가기 위해 이만역을 지나게 되었다. 그러나 백군측 부대가 이곳에 주둔하고 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하지 못했기에 불시에 전투를 치렀다. 초기 전투에서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곧 1,500명에 이르는 백군이 도착하면서 상황이 역전되었다. 제2중대는 끝까지 항전할 것을 결정하고 전투에 나섰으나 결국 몇 명을 제외하고 전멸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한인부대 측은 5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백군 측은 사망 600여 명과 부상 200여 명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전사한 대원들의 시신은 3일이 지난 후 한인들이 눈 속에 임시로 매장하였다. 이후 백군으로부터 이만이 탈환되자 1922년 4월 6일 묘지가 마련되었다.

이만전투가 벌어진 이만역과 추도비는 약 2km떨어져 있다. 현재 이만전투 추도비는 별도의 관리가 없어 보수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현재 소유권은 모스크바의 중앙정부가 가지고 있으나 1년 뒤에는 달레네친스크시 정부에 넘길 예정이다. 이에 맞추어 시정부와 협의하여 추모비를 포함하여 주변 정화사업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