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 金鎰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출신지
강원
운동계열
만주방면
포상훈격
애국장(1995)
주요 활동
국내에서 의병활동, 남만주에서 포수단의 일원 및 대한독립단 총무원으로 국내로 진입해 군자금 모집
관련 조직
포수단, 대한독립단
생애
강원도 출신이다. 경술국치 이전 의병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지나 어느 의병부대에 가담했는지 확실치 않다. 만주로 건너간 후 이진룡(李鎭龍)·조맹선(趙孟善)의 부하로 활동한 것으로 미루어, 이들이 조직한 평산 의병부대에 가담했다가 함께 압록강을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평산 의병부대의 선봉장으로 활동한 이진룡은 1911년 10월 조맹선 일행과 남만주(南滿洲)로 망명하여 포수단(砲手團)을 조직한 바 있었다. 1916년 (음)9월 9일 황봉운(黃鳳雲)·황봉선(黃鳳善) 김원섭(金元燮) 등과 이진룡·조맹선이 이끄는 유격대의 일원으로 국내로 진입했다. 군자금모집이 목적인 유격대의 행선지는 평안북도 운산군(雲山郡) 북진면(北鎭面)에 있는 미국인 경영의 금광이었다. 북진면 금광으로 가기 위해서는 영변군(寧邊郡) 팔원면(八院面) 용성동(龍城洞)의 말씹고개를 통과해야 했기에 유격대는 이 고개 수풀 속에서 금광의 수송차가 통과하기를 기다렸다. 평양에서 황금을 판 대금을 실은 마차 두 대가 나타나자, 대장 이진룡의 지휘하에 현금 수송차로 판단되는 두 번째의 마차를 습격하였다. 그런데 두 번째 마차에는 경비 병력이 타고 있었다. 현금을 확보하지 못한 채 일대 격전이 벌어졌고, 유격대는 피해 없이 본부로 귀대했다. 망국을 전후 해 남북만주로 망명한 민족운동가들은 1918년 1월 이주한인의 중국 국적 취득을 돕고 중국 당국의 지원을 받아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하도록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한 동삼성한족생계회(東三省韓族生計會) 결성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회장은 여준(呂準, 성립 초기에는 중국당국과 소통이 원활한 정안립(鄭安立이 대리회장을 맡음), 부회장은 김약연(金躍淵)이었다. 1919년 4월 15일 의병출신을 주축으로 남만주 류허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 서구(西溝) 대화사(大花斜)에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이 결성되자, 한관모(韓寬模)와 함께 총무원에 임명되었다. 도총재(都總裁)에 박장호(朴長浩), 부총재에 백삼규(白三奎), 사한장(司翰長)에 김기한(金起漢), 총단장에 조맹선 등이 선임되었다. 1919년 7월 부총무부장인 강유상(康有常, 이명 세헌[(世憲)])이 이끄는 유격대의 일원으로 국내에 진입하여, 창성군(昌城郡)과 삭주군(朔州郡) 일원을 순회하며 친일부호와 관공서를 기습해 군자금을 모집하여 류허현의 본부로 귀대했다. 1925년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동지 한치현(韓致賢)과 함께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政機密 제14호, 排日鮮人ノ動靜ニ關スル件」, 1918. 4. 11,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6』,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 스. ; 문일민, 『한국독립운동사』, 애국동지원호 회, 1956. ; 김승학, 『한국독립사』, 독립동지회, 1956.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5권, 19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