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진 金尙鎭

만주방면 애족장(1999) 내국인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출신지
미상
운동계열
만주방면
포상훈격
애족장(1999)

주요 활동

1923~1924년 대한통의부 의용군 활동, 1924년 중국 보갑대와 무기 매매 교섭

관련 조직

대한통의부

생애

출생 연도와 출생 지역은 알려지지 않았다. 1923년부터 1924년까지 남만주에서 대한통의부 의용군 대원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8월 남만주 환런현(桓仁縣) 마권자(馬圈子)에서 서로군정서·대한독립군단·콴뎬동로한교민단·대한광복군영·대한정의군영·평안북도독판부 등 단체 대표들이 모여 남만한족통일회의를 개최하고 대한통의부를 조직하였다. 대한통의부는 총장 아래 민사부·교섭부·군사부·재무부·학무부·법무부·교통부·실업부·권업부·참모부와 비서과, 사판소(事判所)가 설치된 민정과 군정을 겸비한 형태였다. 대한통의부에서는 조직에 참여한 여러 단체의 독립군 대원들을 통합하여 무장투쟁을 수행할 의용군을 결성하였다. 의용군 조직은 1개 대대 아래 5개 중대와 독립중대인 유격대·헌병대 등 7개 중대로 편제되었고, 각 중대는 3개 소대로 구성되었다. 대한통의부 의용군 제1중대 제1소대장 등과 함께 일제 밀정을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1923년 4월 남만주 류허현(柳河縣) 제일구(第一溝) 문양진(問陽鎭) 계장자(鷄場子)에서 송춘벽(宋春碧)과 함께 아편을 밀매하며 밀정 활동을 해오던 오가와(小川)를 처단하였다. 대한통의부에서는 항일 무장투쟁에 필요한 무기 중 일부를 남만주 퉁화현(通化縣) 강산(岡山) 두도구(頭道溝)의 보갑장(保甲長)인 중국인 저우치산(周岐山)을 통해 조달하였다. 그런데 1923년 여름부터 저우치산은 무기 구매 자금을 절취하기 시작하였다. 이후에도 저우치산은 지속적으로 대한통의부에 자금을 강요하였으나 자금 절취를 알게 된 이후 이를 거절하였다. 1924년 1월경 저우치산은 대한통의부에 무기 구매를 논의하자고 요청하였다. 대한통의부 의용군 대원 김용무(金用武) 등 10여 명과 함께 저우치산과 만나게 되었다. 저우치산은 대원들을 포위하고 고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며 자금을 강요하였다. 의용군 측에서는 소지금(所持金)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저우치산이 요구하는 자금 중 일부는 즉시 제공하고 나머지는 추후에 교부하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저우치산은 이에 응하지 않고 대원들에게 총격을 가하기 시작하여 양측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다. 이 교전에서 최덕희(崔德熙)·장재명(張在明)·김성재(金成在)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동아일보』 1923.4.15. ; 『독립신문』 1924.2.2. ; 반병률,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 2009. ; 阿部又重郞(奉天總領事館 通化分館 主任), 「不逞鮮人 및 중국 歸順 馬賊의 動靜에 관한 건」, 1924.4.18,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39』,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