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극 金成極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운동계열
만주방면
포상훈격
애국장(1991)
주요 활동
대한군정서 경신분국 제8분 2과장으로 활동
관련 사건
경신참변, 청산리대첩
관련 조직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
생애
1920년 사망 당시 39세였으므로 1881년생으로 추정되며, 주소는 북간도(北間島)의 옌지현(延吉縣) 추엔밍시앙(春陽鄕) 하마탕(蛤蟆塘)이었다. 하마탕은 1920년대에는 옌지현에 속하였으나, 현재는 거리상 더 가까운 왕칭현(汪淸縣)에 속한 구역이다. 가입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1920년경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일명 北路軍政署) 경신분국(警信分局) 제8분 2과장으로 활동하였다. 대한군정서는 1911년 성립된 중광단(重光團)이 1919년 3·1운동 후 정의단(正義團)-군정회(軍政會)-군정부(軍政府)로 개칭되며 독립군단(獨立軍團)으로서 체계를 갖추다가 같은 해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령 205호에 의해 명칭을 대한군정서로 개칭하고 임시정부 산하 독립군단이 되었다. 서일(徐一)이 최고지휘관인 총재가 되었고, 그 아래 부총재 현천묵(玄天默), 참모부장 이장녕(李章寧), 사령관 겸 사관연성소장 김좌진(金佐鎭), 교수부장 나중소(羅仲昭), 교관 이범석(李範奭) 등이 임명되어 조직을 이끌었다. 대한군정서는 본부 조직 외에도 북간도 각지에 분단과 분국, 그리고 지단 등을 설치하였다. 지방 조직들은 독립군 유지를 위한 군량미와 군복, 군자금 등을 지원하고, 본부의 안전을 위한 경호와 통신 등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당시 40세에 가까운 나이였기에 지역에서 경호와 통신의 업무를 수행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한인들의 지원을 받은 북로군정서와 많은 독립군단들은 수시로 국내로 진입하여 일본을 상대로 유격전을 펼쳐 일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에 일제는 1920년 8월 ‘간도지역불령선인초토계획(間島地域不逞鮮人剿討計劃)’이란 독립군 탄압 계획을 세운 뒤, 그해 10월부터 약 2만 명의 일본군을 서북간도(西北間島)로 침략시켜 이듬해 4월까지 6개월 동안 경신참변(庚申慘變, 또는 間島慘變)이란 대만행을 저질렀다. 이 침략군 중 대한군정서 진영이 있는 왕칭현 방면으로 공격해 들어온 것은 육군대좌 기무라 마스조(木村益三)가 지휘하는 조선군 제19사단 소속 76연대 병력이었다. 하지만 대한군정서 본대는 이들 일본군들이 공격해 들어오기 전에 사전에 정보를 입수하고 병력을 백두산 서쪽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이동 중 허룽현(和龍縣) 3도구(道溝)에 위치한 청산리(靑山里)에 도착한 대한군정서 병력은 1920년 10월 21일부터 10여 일간 대한독립군·국민회군·광복단(光復團) 등 여러 독립군단 병력과 연합작전을 펼쳐 육군소장 아즈마(東正彦)가 지휘한 아즈마 지대(支隊)를 상대로 전투를 벌여 일본군 1,000여 명을 사살하는 대승첩을 거두었다. 청산리대첩이 일어나던 거의 같은 시기에 왕칭현으로 들어온 기무라지대는 대한군정서 병력이 모두 떠난 사실을 알게 되자, 주변 한인 마을을 대상으로 학살을 자행하기 시작하였다. 그중 10월 27일 추엔밍시앙 하마탕에 도착한 일본군 한 부대가 마을에 있던 남성들을 모두 불러내 사전 조사된 명단을 들고 독립군 또는 독립군 지원 세력을 확인하였다. 결국 이들 일본군에 의해 대한군정서 외곽조직원임이 밝혀져 한연하(韓連河)·박성락(朴成洛) 등과 함께 현장에서 총을 맞고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김정명, 『朝鮮獨立運動』 3, 東京: 原書房, 1967. ; 강덕상, 『현대사자료』 28, 東京: みすず書房, 1972. ; 채영국, 「1920년 ‘훈춘사건’전후 독립군의 動向」, 『한국독립운동사연구』 5,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