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기중 蔡基中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본관
인천(仁川)
이명(별칭)
자 : 극오(極五) 호 : 소몽(素夢), 이명 : 채기중(蔡基仲)
출신지
경북 함창(咸昌)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훈격
독립장(1963)
주요 활동
1913년 풍기광복단 조직, 1915년 박상진 등과 대한광복회 조직 후 군자금 모집, 1917년 장승원 처단
관련 조직
풍기광복단, 대한광복회
생애
1873년 (음)7월 7일 경상북도 함창군(咸昌郡, 현 상주시) 이안면(利安面) 소암리(素岩里)에서 아버지 채헌락(蔡憲洛)과 어머니 곡부 공씨(曲阜 孔氏)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극오(極五)이며, 호는 소몽(素夢)이다. 이명으로 한자를 달리한 채기중(蔡基仲)을 썼다. 출생 직전 부친이 사망하여 모친의 훈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한시(漢詩)에 관심이 많았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한국이 사실상 일제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자 1906년 경북 풍기(豊基)로 이주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1913년 (음)1월 전원식(全元式)·정성산(鄭性山) 등과 혁명기관을 설치해 독립을 달성하고자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을 조직하였다. 먼저 자신들의 재산을 모아 자금으로 삼았으며, 의병 출신과 용력(勇力)을 갖춘 이들로 단원을 모집하였다. 특히 진천기군(鎭川起軍)·김산의진(金山義陣)·홍주의진(洪州義兵)·산남의진(山南義陣) 등에서 활동한 양제안(梁濟安)을 영입해 의병활동을 벌인 이들을 중심으로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이러한 노력으로 풍기광복단에는 유창순(庾昌淳)·유장렬(柳璋烈)·한훈(韓焄)·강순필(姜順必)·김병렬(金炳烈)·정만교(鄭萬敎)·김상옥(金相玉)·정운홍(鄭雲洪)·정진화(鄭鎭華) 등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대부분이 의병 출신이거나 국권상실 이후 『정감록(鄭鑑錄)』에 십승지지(十勝之地)로 알려진 풍기로 모여든 이들이었다. 풍기광복단 조직 후 만주의 독립운동기지와 연계해 독립군을 양성한다는 목표 아래 군자금 모집과 청장년의 국외 이주를 추진하였다. 1915년 (음)7월 1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박상진(朴尙鎭)·우재룡(禹在龍)·권영만(權寧萬)·이관구(李觀求) 등과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조직하였다. 박상진은 울산 출신으로 의병장 허위(許蔿)의 제자였으며, 1912년 대구에서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해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삼고 국내외에서 동지들을 규합하고 있었다. 양제안의 소개로 박상진을 만나 동지가 되었고, 박상진이 주도해 결성한 대한광복회에 풍기광복단의 단원들과 함께 참여하였다. 대한광복회는 박상진을 중심으로 풍기광복단·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回復團) 등 의병전쟁 계열과 계몽운동 계열의 독립운동단체들이 연합해 결성되었다. 구성원들은 복벽주의(復辟主義)와 공화주의(共和主義) 이념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나, ‘조국의 독립’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참여하였다. 한말 의병전쟁의 무장투쟁이 갖는 한계를 극복하고, 실력양성을 통해 준비가 되면 일제와 독립전쟁을 감행한다는 독립전쟁론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본부는 사령관 박상진, 지휘장 우재룡·권영만이 책임을 맡았고 전국으로 조직을 확대해 경상도·충청도·전라도·경기도·함경도·평안도·황해도·강원도에 지부를 결성하였다. 또한 대구의 상덕태상회와 영주의 대동상점(大同商店)을 비롯해 대구·영주·삼척·광주·예산·연기·인천 등에 미곡상과 잡화점으로 위장한 거점을 설치하였다. 만주에는 길림광복회(만주지부)를 설치해 독립군 양성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안동여관(安東旅館)·삼달양행(三達洋行)·상원양행(尙元洋行) 등 활동거점을 설치하였다. 대한광복회 조직에 참여한 후 경상도지부장을 맡았다. 1917년 6월 충청남도 예산의 김한종(金漢鍾)을 만나 박상진을 위인(偉人)으로 소개하고, 김한종과 함께 박상진을 방문해 대한광복회에 가입시켜 충청도지부장을 맡게 하였다. 전라도지부장 이병호(李秉昊)에게도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광복회가 있으며 광복회를 위해 노력해 달라’는 말로 설득해 대한광복회에 참여시켰다. 대한광복회에 참여한 후 중점적으로 추진한 것은 자금 모집이었다. 대한광복회 설립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1916년 10월 김낙문(金落文)·이식재(李湜宰)·조우경(趙禹卿)·권재하(權在河) 등과 일본인이 경영하는 강원도 영월의 중석광에 광부로 잠입해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 1915년 11월 17일 지휘장 우재룡과 권영만도 일제의 우편마차를 습격해 자금을 탈취하기도 하였으며, 1916년 (음)8월 초순 박상진·김진만(金鎭萬)·정운일(鄭雲馹)·김진우(金鎭禹)·최병규(崔丙圭) 등은 대구부호 서우순에게 군자금 모집을 단행하였으나 실패하기도 하였다. 사관학교를 설치하고 군대를 양성한다는 대한광복회의 목적을 실현하기에는 자금이 부족하였다. 이에 1917년 (음)6월 우재룡·김한종과 함께 박상진을 찾아가 자금모집을 체계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였다. 전국의 자산가에게 독립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애국심에 호소해 자발적으로 제공하는 자금을 모집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전국의 광복회원들이 각 지역의 자산가를 조사한 후, 이들에게 대한광복회 명의의 통고문을 발송하고 일정한 기간이 지난 뒤에 수령하는 한다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이에 따라 경상도 지역 의연금 모집 책임을 맡아, 1917년 6월 경북 부호들의 성명·재산 정도·주소 등을 조사해, 「경상북도15군조사기」를 작성하였다. 조사된 자산가 명단은 우재룡에게 전달되었고, 1917년 (음)8월 대한광복회 명의의 「포고문(布告文)」이 중국 단둥(丹東)과 평안북도 신의주·정주(定州) 등에서 발송되었다. 대한광복회의 「포고문」은 대자산가들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경상도 지역 소자산가에 대한 의연금 모집도 추진되었다. 1917년 10월 경북 예천 조용필(趙鏞弼)의 집에서 ‘모사(謀事)는 사람에 달려있고 성사(成事)는 하늘에 있으므로 충의의 선비를 모아 민국(民國)을 조직하고 병사를 기르고 농회(農會)를 개창(開彰)하는 데 있어 가장 어려움은 역시 금전이다. 여기에서 생각 끝에 유지(有志) 자산가들에게 간청하여 원조를 구하게 되었다. 이 경고에 위배하거나 불응하지 않으면 첫째는 국가의 행복이요, 둘째는 귀하의 생색(生色)될 것이니, 보통 세상의 예사로운 자들과 동일시 말고, 얼마간의 금액을 며칠까지 준비하여 본회 간사인(幹事人)의 지시를 기다려 서둘러 율령시행(律令施行)과 같이 이행해 주기 바란다’라는 내용의 「경고문」을 작성하였다. 같은 달 20일 유창순(庾昌淳)·윤창하(尹昌夏)·정진화(鄭鎭華) 등과 윤창하의 산지기 집에서 「경고문」 수십 통을 제작하였다. 「경고문」은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수령자의 이름을 기입한 후 도초만(島怊萬)·제의안신(濟義安信)·광복회지령원감독장(光復會指令員監督章)의 인장을 날인한 후 반으로 잘라 첨부하고, 나머지 반쪽은 의연금을 수령할 때 광복회원임을 증명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유창순에게 「경고문」을 경북 함창과 상주에서 발송하도록 하였으며, 김한종·임세규에게 지시해 경북 예천과 안동 일대에서 자금을 모집하였다. 대한광복회의 의연금 모집은 「경고문」 수령자들이 일제에 신고함으로써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따라서 광복회는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친일파를 처단하는 의협투쟁(義俠鬪爭)을 벌였다. 전라도 지부에서 서도현(徐道賢), 충청도 지부에서 박용하(朴容夏), 경상도 지부에서는 칠곡 부호 장승원(張承遠) 등을 처단하였다. 장승원은 경북 지역의 대표적 친일 인물이었으며, 광복회는 의연금 모집을 협의하는 과정에서부터 처단을 계획하였다. 이에 따라 1917년 (음)8월 우재룡·권상석(權相錫)·임봉주(林鳳柱) 등과 두 차례 장승원의 처단을 시도하였다. 첫 번째는 장승룡이 집에 있지 않아 실행할 수 없었고, 두 번째는 소작인들이 모여 있어 실패하였다. 1917년 11월 1일 안동에서 임세규·강순필·유창순과 만나 다시 처단 계획을 세웠으며, 다음날 왜관에 가서 임봉주에게 장승원 집의 상황, 부근의 지리 등을 조사하도록 하고, 대구로 가서 박상진과 거사 계획을 논의하였다. 11월 8일 소지하고 있던 권총과 박상진으로부터 받은 권총 1정을 가지고 장승원의 집에서 10리쯤 떨어진 주막에 유창순과 강순필(姜順必)을 숙박시켰다. 장승원 집에서 여행객을 가장하고 하루 숙박을 하면서 정황을 파악한 후, 다음날 강필순과 장승원을 처단할 것이며, 유창순은 준비한 석유로 장승원의 집을 소각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나라를 광복하려 함은 하늘과 사람의 뜻이니 큰 죄를 꾸짖어 우리 동포에게 경계하노라(曰維光復 天人是符 聲此大罪 戒我同胞), 경계하는 이 광복회원(聲戒人 光復會員)’이라 기록한 『사형선고문(死刑宣告文)』을 직접 작성하였다. 11월 9일 저녁 강순필·유창순과 함께 장승원집을 찾아가 처단에는 성공하였으나 계획대로 집을 소각하지는 못하였다. 이후 장승원의 집과 마을 어귀에 미리 작성해 둔 「사형선고문」을 붙이고 돌아왔다. 이는 장승원의 처단이 개인적인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조국의 광복을 위해 친일파를 처단하였다는 것을 명백히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 대한광복회 명의의 통고문이 발송되면서 일제도 1917년 10월 경부터 단체의 존재를 파악하였다. 통고문은 일제의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중국 단둥, 평안도 정주와 평양, 경북 상주, 충청도 대전 등에서 계속 발송되었다. 일제는 무단통치가 실시되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에서 ‘광복’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단체가 조직되어 자금을 모집하고 의협투쟁을 전개하며 자신들의 정체를 명백히 밝히고 있었기 때문에 광복회원 체포에 수사력을 모았다. 일제는 통고문 수령자의 주소와 의연금 요구액이 자산정도에 비례한다는 점에 주목해 통고문이 가장 많이 발견된 충청도를 중심으로 수사를 집중하였다. 1918년 1월 천안에서 충청도 지부원 장두환이 체포되었고, 이를 계기로 총사령 박상진, 충청도지부장 김한종을 비롯해 충청도·경상도의 광복회원들이 체포되면서 대한광복회는 큰 위기에 직면하였다. 일제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전라도로 활동 지역을 옮기고, 1918년 (음)1월 서울에서 이병호를 만나 전라도 지역에서 의연금 모집을 협의한 후 같은 해 (음)4월 이병호가 조사한 전라도 자산가 명단을 바탕으로 통고문을 제작하였다. 통고문은 이병호로 하여금 충남 대전·전라도 이리(현 전북 익산시)와 정읍 등에서 발송케 하였으며, (음)5월 통고문을 발송한 전라도 보성지역에서 자금 모집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광복회 조직이 노출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보성에서의 자금 모집은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다시 광주로 돌아와 최면식(崔勉植)과 합류한 후 목포에서 군자금 모집을 벌이던 중 1918년 7월 14일 붙잡혔다. 목포경찰서에 구류된 지 20여 일 만에 공주로 이송되었다. 충청도 지부원들이 먼저 체포되면서 공주경찰서가 관할 경찰서가 되었고, 대한광복회원들의 재판도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루어졌다. 1919년 2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며 항소하였고, 같은 해 9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 일부가 취소되었지만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공갈살인 등으로 다시 사형을 받았다. 재차 상고하였지만, 1920년 3월 1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었다. 옥고를 겪다가 1921년 8월 12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형 집행으로 사망하였다. 저술로는 『소몽유고(素夢遺稿)』가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판결문」, 경성복심법원, 1919. 9. 22. ; 「판결문」, 고등법원, 1920. 3. 1. ; 「수형인명부」. ; 「형사사건부」. ; 권대웅, 『1910년대 국내독립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 신용하, 「신채호의 광복회 통고문과 고시문」, 『한국학보』 32, 1983. ; 박영석, 「대한광복회연구-박상진제문을 중심으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 한국민족운동사학회, 1986. ; 박환, 「대한광복회에 관한 새로운 사료 『의용실기』」, 『한국학보』 44, 1986. ; 조동걸, 「대한광복회 연구」·「대한광복회의 결성과 그 선행조직」, 『한국민족주의 성립과 독립운동사연구』, 지식산업사, 1989. ; 박중훈, 「풍기광복단의 명칭과 1916년 재흥설 검토」, 『안동사학』 5, 안동사학회, 2000. ; 김희주, 「소몽 채기중의 항일투쟁」, 『동국사학』 38, 동국사학회, 2002. ; 이성우, 「광복회연구」, 충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