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영 李哲永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출신지
함남 북청(北靑)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훈격
애족장(1990)
주요 활동
1944년 일본군 평양사단 내 학병들의 탈출 추진
관련 사건
일본군 평양사단 학병의거
관련 조직
삼천당
생애
1919년 8월 14일 함경남도 북청군(北靑郡) 신북청면(新北靑面) 신북청리(新北靑里)에서 태어났다. 서울의 경신학교(儆新學校)를 졸업한 후 혜화전문학교(惠化專門學校)에 진학하여 1943년 졸업하였다. 1944년 일본군 내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학병들의 탈출 계획 추진에 참여하였다. 1943년 10월 20일 일제 육군성령(陸軍省令) 제48호로 발포된 ‘조선인학도 지원병제’ 명목으로 사실상의 징병제가 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본적지의 경찰과 면장 등의 강압적 종용으로 같은 해 11월에 지원서를 내고, 12월 13일 함흥공립국민학교(咸興公立國民學校)에서 전형검사를 받은 후 1944년 1월 20일 조선군관구(朝鮮軍管區) 평양사단(平壤師團) 예하 39여단(旅團)에 입영되었다. 6개월간의 기초군사교육을 이수한 후 포병 제47부대의 다다니대(田谷隊)에 배속되었다. 구타와 기합, 민족차별과 멸시로 점철된 내무반 생활을 하면서, 일제의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기만적인 것인지를 실감하고 민족의식이 강해졌다. 이에 자신을 비롯한 학도병들을 중심으로 7월 중순경부터 보병 제42부대 내에 몇 개의 소그룹이 형성되었다. 이를 하나로 묶는 비밀결사로 ‘삼천당’(三千黨)을 결성하여 장차 통일적 집단행동에 의한 대일항쟁을 벌일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움직임이 인접 44보병부대 및 47·48공병부대와 50치중병(輜重兵)부대의 학도병들에게도 은밀히 전파되어 합동교육훈련이나 영내 조우를 통한 상호연락과 정보교환이 이루어지면서 연계의거 준비가 본격화하였다. 구체적 거사 내용으로 평양사단 폭파가 제의되기도 하였으나 폭약과 탄약의 입수가 어려우므로, 일단 부대탈출을 감행한 후 평남 양덕(陽德)에 집결하기로 하였다. 이후 민간인 김한복(金漢福)의 안내를 받아 한만(韓滿) 국경지대와 개마고원 남쪽의 부전고원(赴戰高原) 등 산악지대로 들어가 항일 게릴라전을 펴는 것으로 계획이 확정되었다. 효과적인 실행을 위해 김완룡(金完龍)을 최고지휘자로 하는 참모부 아래 2개 지대를 두기로 하였다. 이때 47·48·50부대의 학도병 동지들을 묶는 4개 분지대(分支隊)를 통할할 제2지대의 지휘자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탈출거사는 추석인 10월 1일에 결행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그 무렵 사단 전체가 부전고원으로 대규모 기동훈련을 떠나게 되어 거사일이 11월 1일로 연기되었는데, 그 사이 47부대의 노영준(盧永濬)이 포섭 및 협조 부탁차 접촉했던 추을(秋乙)헌병대 보조원 임영호(林永鎬)가 밀고함으로 인해 헌병대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더욱이 김완룡이 일본군 상등병을 구타한 사건이 빌미가 되어 학도병 검거가 대대적으로 개시되면서 거사계획의 전모가 드러나고 말았다. 이 일로 헌병대에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1945년 6월 10일 평양사관구(平壤師管區) 법정에서 열린 군사재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을 받았다. 용산의 조선주둔 일본군사령부 안의 육군형무소로 이송되어 옥고를 겪다가 8·15 광복으로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京高特秘 제1074호, 중앙중학교 대 경신학교 생도폭행사건에 관한 건」, 1940. 4. 30, 『사상에 관한 정보 14』.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13, 1977.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9권, 1977. ; 표영수, 「자료소개: ‘평양학병의거사건’ 판결문」, 『한일민족문제연구』 창간호, 한일민족문제학회, 2001. ; 표영수, 「일제말기 병력동원정책의 전개와 평양학병사건」, 『한일민족문제연구』 3, 한일민족문제학회,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