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원 金泰源

국내항일 애족장(1990) 내국인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이명(별칭)
김일(金一)
출신지
경기 안성(安城)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훈격
애족장(1990)

주요 활동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연통제 실시를 주도, 혈복단을 조직하여 군자금 모집

관련 조직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한독립애국단, 혈복단,

생애

1896년 10월 17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이죽면(二竹面) 장계리(長溪里, 현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장계리)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김일(金一)이다. 1916년 서울에 있는 학교를 졸업한 뒤, 5월 상하이(上海)에 있는 후장대학(滬江大學)에 입학하였다. 약 1년 뒤 학자금을 내기가 힘들어지자 자퇴를 하고, 상하이에서 전차차장 감독으로 근무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상하이의 조선인청년단체와 독립에 대한 의견을 나누던 중 오익표(吳翼杓)와 이규용(李奎用)의 소개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安昌浩)를 만났다. 안창호에게 독립운동에 참가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고, 안창호는 충청남도 특파원으로 보낸다는 사령서를 주며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 단장 신현구(申鉉九)와 함께 임시정부 선전, 통신연락, 자금모집 등의 역할을 할 연통제(聯通制)의 실시 등의 활동을 지시하였다. 같은 해 7월 서울로 돌아와 신현구를 만나 연통제에 관한 의견을 나누고, 그에게 연통제 규칙서 3통을 받아 2통은 김순호(金順皓), 1통은 김교상(金敎爽)에게 주는 등 연통제 시행을 위해 노력하였다. 1919년 11월 20일 신현구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면서 대한독립애국단이 사실상 와해되자, 서울 종로 5가 김교선(金敎善)의 집에서 안교일(安敎一)·신봉균(申鳳均)·신상균(申相均)·이정방(李鼎邦) 등과 함께 혈복단(血復團)을 조직하였다. 이 조직의 목적은 임시정부와의 연락, 독립운동 자금의 모집, 민족의식 고취, 시위운동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1919년 12월 이후 활동자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충청남도 논산군(論山郡) 연산면(連山面) 연산리(連山里) 홍진유(洪鎭裕)의 집으로 가서 단체의 가입 권유와 함께 규칙서 10여 매, 선언서 100여 매, 입단서약서 용지 10여 매, 경고문, 독립창가 등을 주며 지역의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하지만 효과가 미미하자 김교래(金敎來)·한진교(韓震敎) 등과 만나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조직하려고 협의를 하던 중 종로경찰서에 붙잡혔다. 이 일로 1921년 11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3년(미결구류일수중 150일 본형에 산입)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지만, 1922년 4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미결구류일수중 90일 본형 산입)이 확정되었다.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뒤, 1924년 4월 17일 가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21. 6. 21. ;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21. 11. 15. ; 「판결문」, 경성복심법원, 1922. 4. 28. ; 『조선일보』, 1921. 1. 9, 2. 11. ; 『동아일보』, 1921. 6. 25·26, 11. 16. ; 1922. 2. 14, 3. 21, 1924. 4. 24. ; 장석흥, 「대한독립애국단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1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7. ; 박환, 「1920년대 초 수원지방의 비밀결사운동 - 혈복단과 구국민단을 중심으로-」, 『경기사학』 2, 경기사학회, 1998. ; 엄찬호,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 강원도단江原道團에 대하여」, 『의암학연구』 19, 한국의암학회,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