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식 朴殷植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본관
밀양(密陽)
이명(별칭)
자 : 성칠(聖七), 호 : 겸곡(謙谷), 백암(白巖), 필명 : 박기정(朴箕貞), 태백광노(太白狂奴), 무치생(無恥生), 창해노방실(滄海老紡室), 백산포민(白山浦民)
출신지
황해 황주(黃州)
운동계열
임시정부
포상훈격
대통령장(1962)
주요 활동
1898년 『황성신문』 주필, 1904년 『대한매일신보』 주필, 1906년 서우학회 창립, 1907년 신민회 참여, 1908년 서북협성학교와 63개 지교 설립, 1909년 대동교 창립, 1912년 동제사 창립, 1913년 박달학원 설립, 1913년 『향강(香江)』잡지 주간, 1915년 신한혁명당 감독·대동보국단 단장·『한국통사』 간행, 1917년 「대동단결선언」 서명, 1919년 대한국민노인동맹단 조직,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 1920년 『한국독립운동지혈사』 간행, 1924년 독립신문사 사장, 1925년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관련 사건
대동단결선언, 강우규 의거, 국민대표회의
관련 조직
대한자강회, 서우학회, 서북학회, 동제사, 신한혁명당, 대동보국단, 대한국민노인동맹단, 대한민국 임시정부
생애
1859년 9월 30일 황해도 황주군(黃州郡) 남면(南面)에서 농촌 서당 훈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자는 성칠(聖七), 호는 겸곡(謙谷)·백암(白巖)이다. 필명으로는 박기정(朴箕貞)·태백광노(太白狂奴)·무치생(無恥生)·창해노방실(滄海老紡室)·백산포민(白山浦民)을 쓰기도 하였다. 10세부터 17세까지 아버지의 서당에서 한문과 정통파 주자학(朱子學)과 과거시험 공부를 하였다. 17세 때에 과거 공부에 회의를 느끼고 집을 나서 안태훈(安泰勳, 안중근의 부친) 등 황해도 일대 청년 명사들과 교유하였다. 이 때 황해도에서는 박은식과 안태훈을 가리켜 ‘두 신동이 나왔다’고 떠들썩하였다. 1880년에 경기도 광주(廣州)에 살고 있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제자인 신기영(申耆永)과 정관섭(丁觀燮)을 찾아가서, 다산이 저술한 정법(政法) 관계의 학문을 섭렵하였다. 이 때 정약용의 저작을 섭렵한 것은 실사구시(實事求是) 학풍에 큰 영향을 끼쳤다. 1882년에 상경하여 임오군란(壬午軍亂)을 목도하였고, 시무책(時務策)을 정부에 제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낙향하여, 평북 태천(泰川)에 사는 박문일(朴文一)의 문하에 들어가 주자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1885년에 어머니의 간절한 요구로 향시(鄕試)에 응시하여 특선으로 뽑혔다. 그 후 1888년부터 1894년 갑오개혁이 일어날 때까지 6년간 능참봉(陵參奉)을 한 것이 관직 생활의 전부였다. 이 무렵 주자학이 경지에 도달하여 서북지방은 물론이요 중앙에서도 유학자로서의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40세(1898년) 무렵에 이르러서는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사상과 운동의 영향을 받고 개화사상을 갖기 시작하였다. 1898년 독립협회 회원이 되었으며,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간부로 활동하였다. 1898년 9월 남궁억(南宮檍), 유근(柳瑾), 나수연(羅壽淵) 등이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하자 장지연(張志淵)과 함께 주필(논설기자)이 되었다.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당한 후인 1900년(42세)부터 성균관의 후신인 경학원(經學院) 강사와 한성사범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1904년 7월 배설(裵說, Ernest Thomas Bethell)과 양기탁(梁起鐸) 등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주필을 지냈다. 1905년 11월 일제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케 하여 국권을 침탈하고, 이를 비판한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의 논설을 실은 황성신문이 정간되었다가 1906년 2월에 복간 되었는데, 1910년 8월 국권 피탈 시까지 황성신문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을 비롯한 이 시기 신문·잡지들에 많은 논설을 써서 국권회복을 위한 신교육구국사상·실업구국사상·사회관습개혁사상·애국사상·대동사상 등을 설파하고 국민을 계몽하였다. 이 시기 그의 사상의 특징으로는 애국계몽운동과 무장운동(의병운동)을 연계하여 함께 전진시킬[연무제진(聯武齊進)] 것을 강조한 점을 꼽을 수 있다. 이때 강조한 애국계몽사상과 운동의 핵심은 자강론(自强論)에 의거한 교육구국과 실업구국에 있었다. 한국민족과 국가가 생존경쟁에서 승(勝)자가 되려면 강(强)자가 되어야 하는데, 이 강자는 다른 강국의 힘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강해지는 ‘자강’이어야 한다. 20세기 초에는 우승열패(優勝劣敗)와 약육강식(弱肉强食)을 공례로 하는 강권주의(强權主義) 시대여서, 강국이 곧 약자를 병탄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국제경쟁에서 민족성쇠와 국가존망을 결정하는 것은 ‘지식’의 명매(明昧)와 ‘세력’의 강약으로, ‘지식’과 ‘세력’이 우승한 자는 생존할 수 있고, ‘지식’과 ‘세력’이 열악한 자는 ‘자연도태’되어 멸망을 면치 못하게 된다. 민족경쟁에서 우승할 수 있는 ‘지식’은 ‘교육’으로 개발하고, ‘세력’은 ‘실업’으로 증진하는 것이다. ‘교육’과 ‘실업’은 양자가 모두 중요하지만 우선순위를 먼저 두어야 할 것은 ‘교육’이다. 왜냐하면 ‘세력’증진을 위한 ‘실업’도 ‘지혜’에서 나오고, ‘지혜’는 궁극적으로 ‘학문’에서 나오는데, ‘학문’은 ‘교육’에서 나오기 때문이라는 요지였다. 당시 동양의 학문은 철학과 윤리학만 서양에 뒤지지 않고, 사회과학·자연과학·과학기술은 서양에 뒤졌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구학문’만 고집하지 말고 ‘신학문’을 신속히 도입 학습해야 하고, 이를 위해 신식학교를 사립으로 신설하여 ‘신학문’으로 교육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비록 이번에는 실패하여 국권을 빼앗겼지만, 모든 국민들이 분발하여 자녀들을 ‘신학문’과 ‘대한정신’·애국심을 배양하기 위한 ‘국학’으로 교육해 놓으면, 이들이 성장하여 강력한 민력으로 일본제국주의를 몰아내고, 반드시 국권을 회복하여 대한의 독립을 공고히 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신교육 구국론의 영향으로 각 지방에 신교육학회가 창립되고, 사립학교 설립과 신교육구국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1906년 3월에 창립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에 가입하였고, 10월에는 서우학회(西友學會) 창립을 주도하였고, 기관지 『서우(西友)』의 주필이 되어 애국계몽에 진력하였다. 1907년 4월 양기탁·안창호(安昌浩)·전덕기(全德基)·이회영(李會榮)·이동녕(李東寧)·이동휘(李東輝)·이갑李(甲)·유동열(柳東說) 등을 비롯한 애국계몽운동가들이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 창립한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원로회원으로서 교육과 출판 부문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1월 신민회의 방침에 따라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가 통합한 서북학회(西北學會)가 창립되자 이 학회를 지도하고, 기관지 서북학회월보(西北學會月報)의 주필이 되었다. 1908년 1월에는 서북학회의 산하 교육기관으로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를 설립하였는데 교장으로 추천된 이종호李(鍾浩)가 독립군기지 창설을 목적으로 망명하게 되자 교장이 되어 신교육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서북학회 활동지역에 서북협성학교의 지교 설립을 추진하여 1908년 5월부터 1909년 말까지 63개 지교를 설립하고 교육구국운동을 확산시켰다. 이 무렵 일제가 신기선(申箕善) 등의 대동학회(大東學會)를 내세워 유림계를 친일화하려는 정치공작을 전개하자 이에 대항하여 1909년 9월 장지연(張志淵)·이범규李(範圭)·원영의(元泳儀)·조완구(趙琬九) 등과 함께 대동교(大同敎)를 창립하였다. 대동사상(大同思想)과 양명학(陽明學)에 입각하여 유교를 개혁해서, 유림계와 유교문화를 국권회복운동에 동원하려 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대표적인 논문이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서북학회월보 제1권 제10호, 1909)이고, 저서로는 『왕양명실기(王陽明實記)』(1910)를 꼽는다. 최고의 애국계몽사상가로서 전국민에게 애국사상을 배양하는데 큰 영향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1910년 8월 29일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병탄되면서 『황성신문』, 『서북학회월보』를 비롯한 모든 언론기관이 폐쇄되었다. 한편, 직접 저술한 모든 서적들은 ‘금서(禁書)’로 압수되고 탄압 당하였다. 일제의 무단탄압에 의하여 한국민족의 ‘국혼(國魂)’이 깃들여 있는 역사책들이 소각됨으로써, 자기 민족의 역사를 잃어버리고 한국인으로서의 긍지와 민족성마저 상실하게 되지 않을까 우려하였다. 또 ‘국체(國體)는 비록 망했지만 국혼(國魂)이 불멸이면 부활이 가능한데, 지금 국혼인 역사마저 불태워 없어지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탄식하였다. 1911년 4월 국외 망명을 결행하여, 만주 환인현(桓仁縣) 윤세복(尹世復)의 집에 기거하며 『동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 『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 『명림답부전(明臨答夫傳)』, 『천개소문전(泉蓋蘇文傳)』, 『단조사고(檀祖事攷)』, 『대동고대사론(大東古代史論)』 등의 역사서를 저술하였다. 1912년 상하이(上海)로 가서 신규식(申圭植)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고, 동포들의 자녀 교육을 위하여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였다. 1913년에 홍콩(香港)으로 가서 중국어 잡지 『향강(香江)』의 주간으로 활동하며, 캉유웨이(康有爲)·량치차오(梁啓超)·탕샤오이(唐紹儀)·징메이주(景梅九) 등의 중국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 계통 인물들과 친교를 맺었다. 『향강』은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전정(專政)을 비판하다가 폐간 당하였다. 1914년 다시 상해로 와서 『안중근전(安重根傳)』을 저술하였고, 1915년 망명 후 꾸준히 집필해 온 『한국통사(韓國痛史)』를 간행하였다. 『한국통사』는 1864년부터 1911년까지의 한국근대사를 ①일반사 ②일제침략사 ③독립운동사의 3면에서 일제침략사를 중심으로 처음 체계화한 역사책이었다. 이 책을 통해 ‘국혼’(國魂)이 담겨져 있는 한국 근대역사를 서술하여, 한편으로 일제 침략의 잔학성과 간교성을 통렬히 폭로 규탄하고, 한편으로는 한국민족의 아픈 역사를 써서 불굴의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고자 하였다. 『한국통사』는 한국근대사의 첫 번째 고전이 된 책이었다. 한국근대사를 ‘국혼’이 담겨져 있으면서도 ‘아픈 역사’인 통사(痛史)로 쓴 이유는 한국 청년들과 한국인들을 독립운동 투사로 양성하는 데에는 침략당한 ‘아픔’(痛)을 가르쳐주는 것이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과거 역사를 보면 일본은 우리 민족을 선생이라 부르고 스승으로 우대하며 배워갔는데, 오늘날에는 일본이 우리 민족을 노예로 대우하니, 이것은 바다가 끓고 산이 무너져도 더 클 수 없는 ‘아픔’(痛)이라고 지적하였다. 이 ‘부끄러움’(恥)과 ‘아픔’(痛)을 씻는 방법으로는 그 ‘부끄러움’과 ‘아픔’을 알게 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다. 이 ‘부끄러움’과 ‘아픔’을 알면 그것을 씻기 위하여 ‘지통심’(知痛心)이 ‘구국주의’(救國主義)의 원동력으로 전환되며, 독립운동의 원동력이 공급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일제 침략과 침탈의 사실을 그대로 가르쳐줌으로서 ‘지통심’(知痛心)과 ‘지치심’(知恥心)을 격발하여, ‘통’(痛)을 없애고 ‘치’(恥)를 씻기 위한 구국주의 독립정신을 결정(結晶)하고 격발시킴으로써, 『한국통사』가 독립운동의 정신적 원동력을 공급하도록 하기 위해 저술했음을 밝혔다. 『한국통사(韓國痛史)』의 내용은 ① 대외적으로 일본제국주의의 한국 침략정책의 간교성과 잔학성을 전세계에 폭로 규탄하고, ② 대내적으로 온 국민과 청년들에게 민족적 통분을 격발시켜 독립운동에 분기하도록 고취하며, ③ 자손만대에 다시는 이러한 실패가 없도록 반성과 성찰을 촉구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한국통사』는 하와이에서 한글로도 번역되었고, 중국·노령·미주의 한국인 동포사회와 국내에 비밀리에 보급되어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1916년에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朝鮮半島史編纂委員會)[1925년에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로 개칭]를 조직하고 『조선사(朝鮮史)』 37책을 편찬하여 한국역사의 왜곡을 시도하였다. 일제는 『조선사편수회 사업개요(朝鮮史編修會事業槪要)』에서 “조선인 망명자 박은식의 『한국통사』처럼 독립사상 고취의 ‘해독’에 대항할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고 밝히고 있음은 『한국통사』의 영향이 매우 컸음을 알려준다. 또 이 무렵 상하이에서 『이순신전(李舜臣傳)』을 저술한 다음 이상설(李相卨), 신규식(申圭植) 등과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을 조직하여 감독으로 선임되었으며, 그 후 신규식 등과 대동보국단(大東輔國團)을 조직하여 단장에 추대되었다. 1918년 노령 한인 동포들의 간청에 응하여 송왕령(宋王嶺)으로 가서 『한족공보(韓族公報)』의 주간에 취임하였다. 신문이 재정 사정으로 발행이 중단된 뒤에는 한인촌의 학교를 돌아다니면서 한국역사에 대한 강연을 통해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이 무렵 『발해사(渤海史)』와 『금사(金史)』를 한글로 역술하고 『이준전(李儁傳)』을 저술하였다. 1919년 노령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3·1운동을 맞이한 후 61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대한국민 노인동맹단(大韓國民老人同盟團)을 조직하여 강우규(姜宇奎) 의사를 국내에 파견하여 일제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에게 폭탄을 투척하였다. 1919년 8월 상하이로 와서 임시정부의 통합과 독립운동을 지원하면서, 1920년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간행하였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1884년 갑신정변부터 1920년 독립군전투까지 한국민족의 독립투쟁사를 3·1운동을 중심으로 서술한 것으로, 한국근대사 분야의 또 하나의 고전을 만든 업적을 쌓았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3·1운동의 특징으로 ① ‘맨손(徒手)혁명’운동인데, 맨손(비폭력)으로 강대한 일본제국주의에 대타격을 가한 세계혁명사에 신기원(新紀元)을 이룩한 운동이다. ② 신분계급·종파·남녀노소를 초월한 전민족 거족적 운동이다. ③ 도시 ·농촌·방방곡곡의 전국적 운동이다. ④ 갑신정변·동학농민혁명운동·독립협회운동·만민공동회운동·의병운동·애국당운동(애국계몽운동) 등 전통의 축적이 폭발한 독립운동으로, 누구도 꺼지게 할 수 없는 독립운동이다. ⑤ 비폭력 3·1운동을 일제는 총검으로 야만적 학살과 만행으로 탄압하려고 획책했으나, 결국 실패하여 일본 군국주의의 황혼을 가져온 운동이다. ⑥ 한국민족이 자력으로 한국독립을 보장한 운동이라고 지적하였다. 안으로는 3·1운동에 의하여 한국민족의 독립역량이 비약적으로 대폭 강화되었으며, 밖으로는 전세계가 한국민족의 독립할 능력과 자격을 인정하고 성원하였으니, 이제 한국독립은 3·1운동에 의해 보장되었다고 평가하였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3·1운동의 결과로써 우리 생애에 독립을 볼 수도 있게 되었으니, 일제의 교란과 탄압에도 굴복하지 말고, 대동단결하여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하자고 호소하였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 실패 후 임시정부가 약화되고 독립운동계가 혼란과 분열에 빠지자, 사태를 수습하고 1924년 독립신문사 사장에 취임하였다. 1924년 6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이승만 대통령 유고안(李承晩大統領有故案)」을 통과시킨 다음, 임시정부 국무총리 겸 대통령 대리로 추대되었다. 1925년 3월 21일 임시의정원은 「임시대통령 이승만 탄핵안(臨時大統領李承晩彈劾案)」을 통과시키고, 3월 24일 의정원은 박은식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취임을 선언하였다. 그리고는 임시정부의 혼란 상황을 수습하기 위한 방책의 하나로 1925년 3월 30일 헌법개정안을 임시의정원에 제출하였다.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을 중심으로 하는 내각책임제로 바꾸자는 요지였다. 이어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전 총재였던 이상룡(李相龍)을 국무령으로 추천 선출케 한 다음, 스스로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이때 인후증과 기관지염으로 병색이 완연하였는데, 임종이 가까워 오자 안공근(安恭根, 안중근의 둘째 동생)에게 다음과 같은 유촉(遺囑)을 받아쓰게 하였다. “나의 병세가 심상치 않게 감각되오. 만일 내가 살아난다면 다행이어니와 그렇지 못하면 우리 동포에게 나의 몇 마디 말을 전하여 주오. 첫째, 독립운동을 하려면 전족적(全族的)으로 통일(統一)이 되어야 하고, 둘째, 독립운동을 최고운동으로 하여 독립운동을 위하여는 어떠한 수단 방략이라도 쓸 수 있는 것이고, 셋째, 독립운동은 오족 전체에 관한 공공사업이니 운동 동지 간에는 애증친소의 별(別)이 없어야 됩니다.” 1925년 11월 1일 67세를 일기로, 동포들에게 독립 쟁취의 최후 목적 달성을 위하여 통일·단결할 것을 당부하는 위의 유촉을 남기고 사망하였다. 저서로는 『겸곡문서(謙谷文稿)』(1901)·『왕양명실기(王陽明實記)』(1910)·『고등한문독본(高等漢文讀本)』(1910)·『동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1911)·『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1911)·『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1911)·『명림답부전(明臨答夫傳)』(1911)·『천개소문전(泉蓋蘇文傳)』(1911)·『대동고대사론(大東古代史論)』(1911)·『단조사고(檀祖事攷)』(1911)·『안중근전(安重根傳)』(1914)·『한국통사(韓國痛史)』(1915)·『이순신전(李舜臣傳)』(1915)·『발해사(渤海史)』(1918)·『금사(金史)』(1918)·『이준전(李儁傳)』(1918)·『성세소설 영웅루(醒世小說英雄淚)』(1910년대)·『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1920) 등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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