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병수 車炳修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출신지
평남 용강(龍岡)
운동계열
임시정부
포상훈격
독립장(1968)
주요 활동
1905년 을사늑약 직후 국권회복을 독려하는 「경고아이천만동포」작성, 1910년 해외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한 군자금 모집, 19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내·외 연락책임 및 군자금 모집
관련 사건
평양음모사건
관련 조직
대한민국 임시정부
생애
1873년 10월 12일 평안남도 용강군(龍岡郡) 하대덕동(下代德洞)에서 태어났다. 기독교인으로서 을사늑약 이후 국권회복을 독려하는 연설을 하였고,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내·외 연락,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기독교인으로 1905년 을사늑약이 발표되자 11월 30일경 김하원(金河苑)·이기범(李基範) 등과 함께 국권을 사수할 것을 결의하고 2,000만 동포들에게 고하는 경고문인 「경고아이천만동포」를 지어 종로 거리에 붙이고 많은 민중 앞에서 연설하였다. 이어서 군중과 합세하여 투석하는 등 시위를 격렬하게 전개하자 헌병들의 증파를 받은 일본군으로부터 해산당하였다. 이때 다른 주도인물들과 함께 헌병사령부로 압송되어 고초를 겪었다. 1910년 결국 일제에게 국권을 침탈당하자 간도(間島)에서 독립군 기지 건설을 위하여 군자금 모집 계획을 추진하다가 다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13년 2월 21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15년을 받고 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가출옥 이후 1921년경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 연락책임을 맡고 소유하고 있던 논과 밭을 팔아 평양경찰서 정문 건너편에 자전거 가게를 위장 경영하였다. 그러면서 임시정부가 국내와의 연계를 위해 시행한 연통제 실시와 군자금 모집 등에 참여하고 국내외 독립투사들의 연락처 제공 등의 활동을 지속하였다. 이후 군자금 모집차 미국으로 건너갈 계획을 추진할 때 독립운동에 가담한 사실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다시 붙잡혔다. 이때 징역 15년을 받고 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다가, 1928년 3월 8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매일신보』, 1913. 2. 11·25.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7권, 1976.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민족독립운동사』 2·13, 1987·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