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우 南成祐

3.1운동 애족장(1990) 내국인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본관
의령(宜寧)
출신지
충남 서산(瑞山)
운동계열
3.1운동
포상훈격
애족장(1990)

주요 활동

1919년 4월 4일 서산군 대호지면과 정미면 만세시위 주도

관련 사건

대호지면 만세시위

생애

1897년 9월 15일 충남 서산군(瑞山郡) 대호지면(大湖芝面, 현 당진시) 도이리(桃李里)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 도호의숙(桃湖義塾)에서 한학(漢學)을 수학하였다. 1919년 3월 3일의 고종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도호의숙 출신의 남주원(南柱元)·이두하(李斗夏)·남계창(南啓昌)·남상직(南相直)·남상락(南相洛) 등의 유생들은 서울로 상경하였다. 이들은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접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시위 소식을 전하였고, 이후 각지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의 열기가 서산 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키는데 자극제가 되었다. 이러한 유생과 지역 유지의 뜻을 모아 만세운동으로 구체화한 것은 면장 이인정(李寅正)을 비롯한 면사무소 직원들이었다. 1919년 3월 26일 대호지면사무소에서 면서기 김동운(金東云)·강태훈(姜泰壎)·민재봉(閔載鳳)과 면사무소 직원 송재만(宋在萬) 등이 회합을 갖고 독립 만세를 일으키기로 뜻을 모았다. 이들은 다음 날인 3월 27일 다시 모여 김동운이 “(장날인) 4월 4일 오전 8시경까지 도로 수선을 위해 면민 각호 1명씩 집합하라는 공문을 작성해 구장들에게 배포하고 정미면 천의시장으로 가서 독립만세를 외치자”라고 실행 방안을 제안하였다. 4월 3일에는 송재만이 9개 마을의 구장에게 도로 수선을 위해 집합하라는 내용의 면장 명의로 된 공문을 전달하며 주민들에게 고지하도록 부탁하였다. 4월 4일 아침 면사무소 앞에 집결한 6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만세시위 대열의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천의장터를 향해 행진하였다. 시위대열이 천의장터에 도착할 무렵 시위대의 규모는 1,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과 함께 장터의 곳곳을 행진하며 천의주재소의 순사들을 무력화시키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만세시위가 마무리될 무렵 천의장터로 급파된 당진경찰서 순사들의 발포로 4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분노하여 천의주재소로 달려갔다. 송재만과 함께 주민들을 지휘하여 주재소 습격을 주도하였다. 이때 도주하는 순사보 유기우(柳冀祐)를 목격하고, 추적하여 주재소 부근에서 구타하였다. 이에 힘을 얻은 군중이 동참하여 유기우를 난타하고, 주재소를 완전히 파괴하였다. 이날 시위 이후 홍성헌병수비대(洪城憲兵守備隊)가 대호지면에 출동하여 가담자에 대한 검거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는 붙잡히지 않고 일본 경찰로부터 소요죄와 보안법 위반으로 수배되어 그 해 10월에야 붙잡혔다. 1919년 10월 27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정치범 처벌령 위반, 소요, 상해를 이유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11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판결문」, 1919. 10. 27, 공주지방법원. ; 「판결문」, 1919. 11. 24, 경성복심법원. ; 『수형인명부』, 대호지면.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3권, 1971. ; 대호지면지편찬위원회, 『대호지면지』, 당진군 대호지면, 2002. ; 박상건 편저, 『당진지역 항일독립운동사』, 당진문화원, 1991. ; 김상기, 『민족교육의 산실 「도호의숙」』, 당진문화원, 2013. ; 박걸순, 「당진 대호지·천의장터 3·1운동의 성격과 특징」, 『한국근현대사연구』 제84집, 한국근현대사학회,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