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金一聲

일본방면 애족장(2010) 내국인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출신지
경북 경주(慶州)
운동계열
일본방면
포상훈격
애족장(2010)

주요 활동

1928년 이후 가나가와현 조선노동조합에서 활동하고, 1931년 전협 토목건축노동조합 가나가와 지부와 관동소비조합연맹 소비조합 지부 결성했으며 시즈오카현에서의 지부 조직 활동을 전개함

관련 사건

가나가와현 히라사쿠가와 개수공사 노동쟁의, 시즈오카현 가노가와 개수공사 노동쟁의, 상애회 본부 마고메출장소 파괴 활동

관련 조직

가나가와현 조선노동조합, 토목건축노동조합 가나가와지부와 쇼난지구 마나즈루 분회, 가나가와현 쇼난소비조합

생애

경상북도 경주(慶州) 출신이다. 일제 측 기록에 따르면 1898년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이름을 금전이랑(金田二郞)으로 고쳤다. 1928년부터 가나가와현(神奈川縣) 조선노동조합(朝鮮勞動組合)에서 활동하였다. 조선노동조합은 1927년 4월 일본 내 최대 조선인 노동단체인 재일본조선인노동총동맹(在日本朝鮮勞動總同盟)이 1현 1조합을 표방하여 만든 것으로, 결성 직후 3,032명의 조합원이 가입하였다. 대부분 토목건설에 종사하는 자유노동자였다. 일제가 조선공산당 일본총국(日本總局)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각지의 노동조합이 타격을 입었고 가나가와 조선노동조합 지도부 역시 대부분 붙잡혔다.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중앙부는 현상 타파를 위해 조직을 해체하고,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이하 전협) 산하로 들어갈 것을 결의하였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1931년 4월 동지 김범이(金凡伊)·김영준(金英俊)·정호룡(鄭虎龍) 등과 함께 비밀리에 ‘전협 토목건축노동자조합 가나가와지부’(이하 전협 토건 가나가와지부)를 창립하였다. 조직 복구와 회원 모집에 힘쓴 결과 같은 해 12월 조합원이 900명에 이르렀다. 전협 토건 가나가와 지부의 수뇌부로서 현내 각종 조선인 노동문제에 관계하였고 노동쟁의에 대한 원호 활동을 펼쳤다. 1931년 9월 현내 우라가마치(浦賀町) 소재 히라사쿠가와 개수공사(平作川 改修工事) 현장 노동자가 고용 불안을 이유로 총파업을 결의하고, 도움을 요청하자 현장에 잠입해 지도부를 설치하고 운동을 지휘하였다. 일본 경찰의 탄압으로 운동이 좌절되자 곧바로 2차 운동을 기획하여 붙잡히기도 하였다. 1932년 1월에는 관동소비조합연맹(關東消費組合聯盟) 산하 쇼난무산자소비조합(湘南無産者消費組合)을 조직해, 격문과 뉴스 등을 발행·배포하고 각종 회합을 열어 조선인 노동자 단결을 도모하였다. 이어 1932년 8월, 시즈오카현(静岡縣) 슨토군(駿東郡) 소재 가노가와(狩野川) 개수공사 노동쟁의 현장에 잠입하여 노동자를 돕고, 토건 시즈오카지부 결성을 시도하여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이후 1933년, 친일노동단체 상애회(相愛會)가 현내 마고메(馬込)지부를 중심으로 노동운동의 개량화를 도모하자, 강영수(姜永守) 등과 협력하여 상애회 파괴활동에 나섰다. 1933년 전협 토건 가나가와 지부 책임자 중 한 명이라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가 석방되었고, 이후 5월 23일 쇼난무산자소비조합 이사로 취임하였다. 이후의 활동은 자료의 미비로 확인하기 어렵지만, 가나가와현에서 노동운동을 지속하다가 1937년 붙잡혀 1938년 2월 석방된 뒤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特高月報』 1932. 1, 1932. 8, 1932. 9. ; 金正明 編, 『朝鮮獨立運動』 Ⅳ, 東京: 原書房, 1967. ; 朴慶植 編, 『在日朝鮮人關係資料集成』 2, 東京: 三一書房, 1975.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3, 1978. ; 강만길·성대경 편,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 창작과비평사,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