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환 金昌煥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출신지
평남 순천(順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훈격
대통령표창(2007)
주요 활동
1919년 3월 4일 평안남도 순천군 자산면 만세시위 참여
생애
평안남도 순천군(順川郡) 자산면(慈山面) 청룡리(靑龍里)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877년생으로 추정되며, 1919년 3월 순천군 자산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평안남도 중앙부에 있는 순천군은 동쪽으로는 맹산군, 서남쪽으로는 평원군·대동군, 남쪽으로는 강동군·성천군, 북쪽으로는 안주군·개천군·덕천군과 접하고 있다. 순천군의 독립만세시위는 1919년 3월 2일 은산면(殷山面)에서 일어난 것을 시작으로 4일에는 자산면(慈山面)에서, 6일에는 순천면에서 잇달아 일어났다. 3월 2일 순천군 은산면에서는 은산면 천도교구실을 책임지고 있는 김기수(金基洙)가 주도하여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천도교인과 주민을 포함하여 1,000여 명의 시위군중이 독립만세를 부르고 해산하였다. 다음날인 3월 4일에 전날 시위에 참여한 김보전(金寶傳)·방기후(方基厚)·유경중(劉景重)·이덕태(李德泰)·이영방(李永芳)·장두성(張斗星)·조운용(趙雲龍) 등이 붙잡혔다. 은산면 천도교구가 주도하여 일으킨 은산면 만세시위 다음날 평양(平壤)에서 21명의 일본군이 투입되었다. 순천군에서는 1909년 「통감부령(統監府令)」으로 백일세(百一稅)를 걷게 되자 1910년 1월 29일 상인들이 거세게 항의하면서 유혈충돌이 발생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백일세란 시장에서 농민들이 판 농산물 대금의 100분의 1을 세금으로 거두는 제도를 말한다. 일본인 관리가 거세게 항의하는 상인들에게 발포하여 6명이 죽고 12명이 부상을 당하자, 분노한 상인들이 일본인들을 공격하여 15명을 살해한 일도 있었다. 3월 4일 순천군 자산면 자산리 시장에서 일어난 만세시위 역시 천도교인들이 주도하였다. 자산면 천도교구실을 책임 맡고 있는 김선오(金善五)가 천도교인과 함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고, 시위대의 규모는 약 1,000명이었다. 이날 시장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보고 함께 만세를 부르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헌병대는 순천 천도교구장 최단봉(崔丹鳳)과 순천교회의 김점환(金占煥)·유응진(劉應鎭)·표영각(表永珏) 등을 불러 시위를 엄단한다고 경고하였다. 하지만 순천면의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은 오히려 서둘러 시위를 준비하였다. 3월 6일에는 순천면에서는 야산당공원(野山唐公園)에 2,000여 명의 시위군중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갖고 시위행진을 벌였다. 시위대는 군대와 충돌하면서 해산 당하였다. 3월 4일 시위 때 김상윤(金相允)·김재진(金載珍)·김창렬(金昌烈)·백남규(白南奎)와 함께 붙잡혀 평양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5월 27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 당하였고, 다시 상고하였으나 그 해 7월 3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당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판결문」, 고등법원, 1919. 7. 3.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2권, 1971. ; 김정인·이정은, 『국내 3·1운동Ⅰ- 중부·북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