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택 金鍾澤

3.1운동 애족장(1990) 내국인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출신지
강원 양양(襄陽)
운동계열
3.1운동
포상훈격
애족장(1990)

주요 활동

1919년 4월 6일 양양군 손양면 만세 시위 주도

관련 사건

양양군 손양면 만세 시위

생애

1875년 9월 25일 강원도 양양군(襄陽郡) 손양면(巽陽面) 상왕도리(上旺道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양양 지역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삼익서당(三益書堂) 훈장의 손자로 1919년 당시 상왕도리 구장(區長)을 맡고 있었다. 손양면은 양양군 동면(東面)과 남면(南面)을 합쳐 만든 면이었다. 그래서 동면과 남면이 나뉘어 만세시위를 벌였다. 동면은 유생과 양반 출신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동면 출신 주민들은 4월 4일 일어난 양양면 장날의 만세시위 때 대부분 참여하였다. 점심 때가 되자 만세 군중이 더욱 불어나 4,000여 명에 달하였다. 오후에 시위 지도부와 경찰이 전날 임천리에서 체포한 22명의 석방 교섭을 하던 중 함홍기(咸鴻基)가 칼에 찔려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분노한 시위대는 경찰서와 군청을 공격하였다. 저녁이 되자 시위대는 군청과 경찰서에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휘둘러 때려 부수었다. 경찰이 총을 쏘면서 손양면 간리(間里)에 사는 권병연(權炳淵)과 서면(西面) 상평리(上坪里)에 살던 김학구(金鶴九)가 즉사하였다. 이 사건은 남면(南面) 출신들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남면 구장들을 중심으로 만세시위가 급하게 계획되었다. 이때 주리(舟里)의 구장 최한두(崔漢斗), 우암리(牛岩里)의 구장 김진렬(金振烈)과 함께 시위 준비를 주도하였다. 손에 들 태극기를 만들 여유도 없이 4월 6일 3백여 명의 주민을 이끌고 양양면으로 향하다가 하왕도리(下旺道里)에서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이를 간신히 물리치고 간리 고개를 넘어 행진하였다. 시위대의 맨 앞에는 대형 태극기와 ‘대한독립지기(大韓獨立之旗)’라 쓴 깃발이 휘날렸고 그 뒤로는 주리에서 온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쓴 깃발과 농악대가 따랐다. 시위대는 양양면으로 건너가기 위해 건너야 하는 남대천(南大川)을 사이에 두고 경찰과 마주보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4월 5일에 이어 6일에도 만세시위를 벌인 도천면(道川面)과 강현면(降峴面) 주민들이 연창리(連昌里)에서 제지하는 군대를 물리치고 양양면내로 들어와서 만세시위를 벌여 경찰이 그쪽으로 향하자 손양면 주민들은 동서로 흩어져 양양면으로 들어가 시위 대열에 합세하였다. 경찰서장이 일본은 물러갈 터이니 만세만 부르고 돌아가 달라고 애원하여 결국 시위 군중은 저녁에 해산하였다. 1919년 4월 5일과 6일의 시위를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붙잡혔다. 1919년 4월 21일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아 항소하여 1919년 5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으로 감형받았으나 상고하였다. 그 해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면서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판결문」, 경성복심법원, 1919. 5. 31. ; 「판결문」, 고등법원, 1919. 7. 5. ; 『매일신보』 1919. 5. 3. ;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3권, 1970. ; 광복회 강원도지부, 『강원도 항일독립운동사』 (Ⅰ)·(Ⅲ), 1991. ; 김정인·이정은, 『국내 3·1운동Ⅰ- 중부·북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조동걸, 『3·1운동의 역사』, 역사공간, 2010.